재림마을

진리를 찾는 당신에게

6장

Faith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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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과 재림과 부활<그림 수정>

 

1. 예수님은 어떤 문제로 사두개인들과 논쟁을 하셨습니까?(마 22: 23- 3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마 22:23-33)


2. 사도들이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에게 미움을 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행 4:2)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행 4:2)


3. 예수님은 재림 때에 각 사람에게 무엇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까?(마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4. 예수님은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어떻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리고 무슨 부활과 무슨 부활이 있다고 하셨습니까?(요 5:28, 2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5. 생명의 부활은 언제 있습니까?(살전 4:16, 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6, 17)


6. 성경은 생명의 부활을 몇째 부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계 20:5,6)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계 20:5,6)


7. 심판의 부활은 언제 있습니까?(계 20:5, 11-13)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계 20:5)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그 시에 큰 지진이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11-13)


8. 최후의 심판으로 악인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몇째 사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계 20:14, 21:8)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 20:14)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21:8)

☞ 성경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고 정의합니다. 지옥은 지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최후 심판의 때에 이 땅이 일시적으로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9. 예수님은 오라비를 잃고 슬퍼하는 마르다에게 부활과 영생을 설명하신 후 어떤 질문을 하셨습니까? 당신의 답변은 무엇입니까?(요 11:25, 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 26)

 

<참   고>
“당신들은 몸을 떠난 영혼들을 천국이나 지옥, 연옥에 둠으로써 그리스도와 바울이 입증한 부활의 논증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부활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을 매 시간 바라보도록 깨우치고 있다. 이교의 철학자들은 이것을 부인하고 영혼은 언제나 살아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내게 답하라. 만약 영혼들이 하늘에 있다면 그들이 왜 천사들의 경우와 같지 못한가? 그런 뒤에 (새삼스럽게) 부활이 있어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 부활과 영혼불멸을 동시에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William Tyndale, An Answer to Sir Thomas More's Dialogue, Book 4, pp.180,181)

“영혼은 몸이 죽을 때 소멸되며 하나님께서는 이후 몸과 함께 부활시킨다”(Luther, Defence Proposition No.27)

“초대 기독교적 부활 신앙은 영혼 불멸에 대한 헬라적 관념과 조화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신약에서는 언제나 죽음을 궁극적인 원수라고 생각함으로 죽음에서 친구를 찾았던 헬라 사상과는 극적인 대립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바울은 ‘오 죽음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쓰지 않았는가?” (Oscar Cullmann, 영혼불멸인가 죽은 자의 부활인가, 전경연 편, p.12)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영혼이 원래부터 불멸이라는 사상을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이 사후에 다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활이라고 하는 하나의 기적을 통해서 뿐이다”(기독교 신학사전 379)

예수님과 사도들의 복음은 재림 때 있을 몸의 부활로 인한 불멸이었지 결코 영혼 불멸이 아니었습니다.

 

<질문과 답>

1. 성경 마가복음 9:43에 보면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세 종류의 지옥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죽은 사람들이 각기 세 장소 중 한 곳으로 간다는 말은 아니라 전혀 다른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 성경의 "스올"과 신약 성경의 "하데스"입니다. 구약의 스올과 신약의 하데스가 동일한 곳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시편 16:10과 이를 인용한 사도행전 2:27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곳은 선인이나 악인을 막론하고 누구나 가는 장소인 "무덤"을 가리킵니다. 옛날 성경과는 달리 현대어 번역들은 대부분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무덤으로 바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타르타루스"입니다. 이 말은 신약 성경  베드로 후서 2:4에 단 한번 사용되었는데 우리 성경에는 “지옥”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천사들이 지금 지옥이라는 장소에 있지 않고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습니다. 타르타루스는 “어두운 구덩이”(a dark abyss)를 뜻하는데 유다서 1:6에서도 범죄한 천사들을 “흑암”에 가두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 계시록 12:7-9에 보면 범죄한 천사들이 바로 “땅으로 내어쫓”겼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타르타르스는 범죄한 천사들이 쫓겨난 곳, 바로 범죄로 어두워진 "이 세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곳은 죽은 사람이 가는 장소가 아닙니다.

세째로는 "게헨나"입니다. 우리 성경에 11번이나 지옥으로 번역되었는데 질문하신 성경절도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특히 게헨나는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게헨나는 실존했던 지명입니다. 예루살렘 남쪽 계곡이 그곳인데 고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하던 장소를 요시아 왕이 쓰레기장으로 만들어 죄수들의 시체와 죽은 짐승, 온갖 쓰레기들을 버리고 불태웠던 장소입니다(왕하 23:10). 예수님 당시에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만 예수님은 후일 악인들의 받을 둘째 사망을 언급할 때 이 게헨나를 비유적으로 인용한 것입니다(제4과 7번과 8번 문제를 참고하십시요). 이 세상은 최후 심판 때 잠시 동안 불못이 될 것이며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실에 따라 불못에 던져저 소멸될 것입니다(계 20:7-10, 13,14; 벧후 3:10-13).

마태복음 18:8의 “영원한 불”, 마태복음 25:41의 “영영한 불”, 요한 계시록 20:10 “세세토록” 등은 모두 헬라어 “아이온”에서 유래한 “아이오니오스”(αιωνιοs)인데 “아이온”의 본래 의미는 “시대”입니다. 연루된 의미로는 “영원”, 함축적으로는 “세상”, 유대적으로는 “메시아 시대” 등 여러 의미로 번역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모두 사용되었는데 대상에 따라 하나님께는 “영원”을, 사람에게는 “일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의인들에게 적용될 때는 영생을 의미하고, 악인들에게 적용할 때는 영멸을 의미합니다. 유다서 1:7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영원한(아이오니오스) 불의 형벌”을 받았다고 하였는데 지금 소돔과 고모라를 태우고 있는 불은 없습니다. 이것은 소돔과 고모라가 소멸할 때까지 결코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이지 영원히 타고 있는 불은 아닙니다.

누가복음 3:17의 쭉정이를 태우는 “꺼지지 않는 불”이나 예레미야 17:27의 예루살렘 궁전을 태우는 “꺼지지 아니”하는 불 등도 쭉정이나 성문이 없어질 때까지 타는 불이지 쭉정이나 성문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꺼지지 않는 불, 혹은 영원한 불은 죄인이 완전해 소멸할 때까지 타는 불이라는 뜻이지 죄인이 계속 불 가운데 고생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죄의 삯은 사망인데 어떻게 죄인이 영원히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영혼이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망은 육체를 가리킨다고요? 그러면 더 중요한 영혼의 운명에 대하여는 왜 성경이 침묵하고 있습니까? 사람의 영혼이 죽어 이미 지옥 불에 들어가 심판을 받고 있다면 도대체 그들이 다시 부활하여 또 다시 지옥 불못에 들어갈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죄인은 타지도 않고 오직 고통만 주는 영원한 불은 없습니다.

2. 누가복음 16:19-31 보십시요. 사람이 죽어 천당이나 지옥에 간다는 명백한 증거가 예수님의 이야기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16:19-31의 말씀은 결코 실제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비유입니다. 14절에는 이 비유의 목적이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부(富)는 하나님의 은총을 많이 받은 증거이므로 부자는 당연히 천국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잘 알려진 이야기를 통하여 그러한 생각에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실제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⑴ 부자가 간 곳을 "음부"라고 하였는데 원어로는 무덤을 가리키는 "하데스"입니다(“질문과 답” 1번을 참고 하십시요). 무덤 속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입니다.

⑵ 나사로가 간 곳이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 품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⑶ 24절에 보면 그가 불꽃 가운데서 고통한다고 하는데 과연 영혼이 뜨거움이나 목마름 등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육체가 느끼는 감각들입니다.

⑷ 25절의 아브라함 말에 모순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천국과 지옥은 이 세상에서 고생을 했느냐 안했느냐를 기준으로해서 결정한다는 말이 됩니다.

⑸ 과연 천국과 지옥이 서로 마주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일까요? 그리고 그곳이 정말 천국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곳은 지옥보다 더한 고통의 장소가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 당시에 잘 알려진 이집트의 설화입니다. 그것은 파피루스에 기록되어 있는데 시-오시리스(Si-Osiris)와 그의 아버지 세톤 카임붸제(Seton Chaemwese)가 죽음의 나라를 여행하는 내용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가난한 서기관과 부유한 세리 바르 마얀"의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Joachim Jeremias, 예수의 비유. 허혁 역, 왜관:분도출판사, 1974, p.177). 비유는 교훈을 얻는 데서 그쳐야지 비유 자체를 실제화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면 이솝의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이야기는 끈기와 노력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고자 만든 이야기이지 실제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3. 누가복음 23:43에 예수께서 십자가의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것은 사람이 죽으면 즉시 낙원에 간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⑴ 예수님의 말씀을 질문하신대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은 강도보다 몇 시간 먼저 돌아가셨기 때문에 함께 낙원에 갈 수가 없었고(요 19:32-34) ⑵ 예수님도 돌아가신 그날 낙원에 가신 것이 아니라 일요일 부활한 후였습니다(요 20:17). 어떤 분들은 낙원과 하나님이 계신 곳이 다르다고 주장하는데 요한 계시록 2:7에는 하나님의 낙원에 생명나무가 있다고 하였고, 요한 계시록 22:1, 2에 보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 앞에 생명나무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낙원이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질문하신 성경절은 구두점에 관한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 성경은 예수님과 강도가 당일에 낙원에 갈 것처럼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고대 헬라어가 띄어쓰기나 구두점들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 혼란입니다. 원문을 단어 나열 순서 그대로 옮겨 놓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르시되 그에게 예수께서 진실로 내가 이르노니 네게 오늘 나와 함께 네가 있으리라 낙원에”

여기서 “오늘”을 약속한 시간에 관련시키느냐 혹은 낙원에 가는 시간에 관련시키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집니다. 앞에서 말한 내용에 기초하여 보면 이것은 약속한 시간과 관련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질문하신 성경절은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4. 마태복음 25:46에는 악인들이 영벌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악인들에 대한 영원한 벌(징벌)은 사망입니다. 악인들이 영원히 고통 가운데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의 품성에 비추어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악인이 불과 100년도 못되는 생애 동안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다해도 그에 대한 댓가로 영원한 세월 동안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말라기 4:1에 보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하였고 시편 37:20에는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 되어 없어지리로다”고 하였으며, 시편 37:10에는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5. 전도서 12:7에는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神)은 그 주신 하나님께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 신(神)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인데 이것은 본래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호흡”이나 “생명”입니다. 실제 이 말은 언제나 의사를 표현하고 활동하는 이성적인 존재에게만 사용되며 “루아흐”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는 전혀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어 성경(성서교재간행사, 1991년)에서는 “그 때가 되면 흙에서 온 네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네 생명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만일 루아흐를 영혼으로 번역한다면 욥기 27:3의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루아흐)이 내 코에 있느니라”는 말씀에서 영혼이 코에 있다는 우스운 말이 되고 맙니다.


6. 마태복음 10:28에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되어 있어서 몸은 죽어도 영혼은 산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다시 자세히 읽어보십시요. 위의 성경절은 영혼이 불멸한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은 영혼까지 멸망시키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어서 오히려 영혼불멸설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하는 성경절입니다.

여기 사용된 “영혼”은 헬라어로 “프쉬케”인데 본래는 “호흡”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맥에 따라 “목숨, 마음, 영혼, 생명”등으로 번역됩니다. 마태복음 10:39에서는  “자기 목숨(프쉬케)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프쉬케)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였는데 여기 “목숨”을 영혼으로 번역하면 우스운 말이 됩니다.

질문하신 성경절의 영혼은 “생명” 혹은 “목숨”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12제자를 파송하시면서 그들이 받을 핍박에 대한 교훈을 주시고 계십니다.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은 그들을 핍박하고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결코 제자들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빼앗아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한번 죽을 것이나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름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죽이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소멸시키는 분입니다. 사단에게 죽임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부활할 것이나, 하나님에 의해 불못에 던져지는 죄인들은 소멸하여 없어질 것입니다(계 20:12-15).


7. 요한 계시록 6:9, 10에는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기도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죽은 자의 영혼이 있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본문의 내용이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에 속할 것입니다. 창세 이후로 순교한 모든 사람이 제단 아래 어떻게 모여 있을 수 있겠으며, 11절의 흰두루마기를 육체가 없는 영혼들이 어떻게 입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아우의 핏소리가…호소”(창 4:10)한다든지, “삯이 소리지른다”(약 5:4)든지,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계 16:7)고 한다든지 하는 것과 같이 하나의 의인화된 표현입니다.

핏소리가 하나님께 호소한다든지, 순교자들이 자신들의 피에 대하여 신원하여 주기를 호소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순교자들의 죽음을 주목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해 있음을 의인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순교자들은 하나 같이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행 7:60).


8. 고린도 후서 5:8에 보면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하여 바울도 그의 영혼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바라지 않았습니까?

질문하신 성경절과 전후 문맥은 현대어 성경(성서교재간행사, 1991년)에 보면 더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육체가 죽으면 하늘에 있는 새로운 몸, 곧 영원한 집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4절을 보면 “2우리는 이미 이 세상살이에 지쳐 신음하며 새 옷을 갈아입듯 하늘의 몸을 입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3그것은 우리가 몸이 없는 영으로만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4이 땅에서 이 몸을 입고 살아가면서 힘들어 신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새로운 몸 입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그리하여 이 죽을 몸이 영원한 생명을 덧입기를 바라는 것입니다”고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죽음에 굴복하는 지금의 육체를 벗고, 영원한 집 곧 영원한 육체를 언제 갖게 되기를 소망하고 있었습니까? 죽은 직후일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52-54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바울은 재림의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질문하신 내용의 “몸을 떠나”는 일은 죽음을 뜻하고, “주와 함께 거하는” 일은 재림의 때에 죽은 자가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하고 살아있는 자들이 홀연히 죽지 않을 몸으로 변화될 때 성취될 것입니다.


9. 빌립보서 1:23에서 바울이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고 한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바울이나 우리가 언제 주와 함께 있게 될까요? 죽는 즉시 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고 하셨고 데살로니가 전서 4:16-18 “주께서…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 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6-19). 만일 사람이 죽어서 그 영혼이 즉시 하늘에 갔다면 이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오시는 재림의 때부터 주와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딤후 4:6-8)


10. 데살로니가 전서 4:14에는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주와 함께 자는 자들을 데리고 오시려면 그들이 하늘에 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늘에 간 영혼들이 “자고” 있다니요? 신약 성경에서는 “죽음”을 “잠”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혼들이 하늘에서 죽어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데리고 오시리라”는 말은 헬라어로 악쎄이(αχη)입니다. 사전에서 이 단어의 뜻을 찾아보면 1.가다(go) 2.데리고 가다(take) 3.인도하다(lead) 4.데리고 가다(lead away) 5.안내하다(guid) 6.데리고 오다(bring)등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악쎄이(αζει)는 아고(αγω)의 미래 직설법 능동태 3인칭 단수형입니다]

질문하신 성경절 전체는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입니다. 성경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고 다음에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 그와 같이 되리라는 확증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맥에 맞추어 성경을 번역하려면 악쎄이는 “데리고 가시리라”로 번역해야 맞습니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일으키시리라”가 옳습니다. 그러므로 최근에 번역된 성경들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⑴한글 새번역 성경
“그렇다면 예수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와 함께 일으키실 것입니다”

⑵공동번역 성경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을 믿습니다”

⑶현대어 성경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미 죽어서 세상을 떠난 모든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을 믿습니다”


11 .전도서 3:21에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본문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알랴?”는 말은 아무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공동번역은 “사람의 숨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숨은 땅 속으로 내려간다고 누가 장담하랴!”고 번역했고, 현대어 성경은 “인간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저 깊은 땅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여기 “혼”은 “루아흐”인데 공동번역이 “숨”으로 번역한 것은 잘한 것입니다. 만일 죽은 사람의 혼이라면 짐승도 혼이 있다는 말이 되고 땅 속에는 짐승의 혼이 가득하다는 말이 되어 어리둥절하게 됩니다.

문맥을 살펴보면 18절에서 사람이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하심이라”고 하였고 20절에는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라고 한 후 질문하신 성경절이 나옵니다. 이것은 사람과 짐승의 숨이 각기 다른 곳으로 간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죽기는 일반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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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과 재림과 부활<그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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