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교과에는 나오지 않는 교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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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은영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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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3.08.09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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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은영의 ‘헬라어로 읽는 에베소서 특징’ (3)
오늘은 찬양으로 시작해 볼까요?
“면류관 가지고 주 앞에 드리세”
교회에서 부르는 시작 찬미로 익숙한 이 노래는 요한계시록 4장에 나오는 장면을 바탕으로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신 가운데 하늘 존재들의 찬양이 물결칩니다. 흰옷을 입고 앉아 있던 장로들도 자신이 쓰고 있던 금면류관을 벗어 엄숙히 보좌 앞에 놓습니다. 자신의 승리가 자신에게 속하지 않고, 그 면류관을 앞에 둔 존재에게 속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행동입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뜻에서 나왔고, 그로 말미암아 존재한다는 것을 공표하며 온전히 경배합니다.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람에 대한 칭찬은 진심을 담지 않아도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을 잘 읽어주는 노래는 입에 착 달라붙는 맛이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붙은 교회의 음악이 입술을 움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진정을 다해 올리는 찬양은 얼마나 자주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고 있습니까?
그렇게 어려운 찬양을, 에베소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이라고 세 번에 걸쳐 말합니다. 6절은 성부 하나님의 뜻, 12절은 그리스도의 뜻, 14절은 성령님의 뜻으로 각 삼위 하나님과 연결돼 공통되어 나타나죠.
더불어 그리스도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보증인 성령을 통해 구속받는 것에 대한 부연 설명(6, 14절) 그리고 하나님의 기업이 됨(12절)의 목적으로 제시됩니다.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지으셨다는 이사야서의 말씀과 겹쳐집니다(사 43:21).
한역본에서는 세 절이 조금 다르게 표현돼 있으나, “은혜의”가 6절에 들어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세 절의 헬라어 문구는 같습니다. 찬미하는 것(동사)이 아닌 찬미가 되는 것(명사)으로, 찬양은 일시적 행동이 아닌 정체성이 되는 것입니다. 찬양하는 행동은 언제, 혹은 어디라는 일시적이거나 제한적인 반경에 속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찬양, 그 자체가 되라는 것은 제한 없이 우리의 전 존재를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를 소금과 빛(마 5:13, 14),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고후 2:15; 3:3)라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부르시는 것처럼, 지속적이며 전인적인 찬양의 삶이 되기를 초청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찬양이다…?! 그런데, 찬양하는 것이든, 찬양되는 것이든, 우리로 하여금 멈칫 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찬양을 받고 싶어하시지?’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궁금증을 툭 치는 장치가 바로 3절에 있습니다. 3절은 한역판에서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해 “우리에게 복 주시되”로 마칩니다. 원어 표현은 두 단어가 비슷하게 생겨서 그보다 더 주의를 환기시키는 맛을 줍니다. “찬송하리로다”와 “복 주시되”가 각각 율로게토스(εὐλογητός)와 율로게오(εὐλογέω)로,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동사 율로게오는 ‘축복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같은 단어를 사용해 형용사 율로게토스를 ‘축복받은’이라고 번역하는 게 맞을 것 같지만,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행동이므로 ‘찬송’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 같은 두 단어의 유사성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의 긴밀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시간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주’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선행합니다. 우리가 인식하기 이전부터,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실행하셔 왔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찬양은 그에 대한 반응인 것이죠. 그분이 먼저 우리를 위해 기쁘신 뜻을 베푸시며, 자신의 피를 흘려 구속하셨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찾아오면서 찌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의 이기성이지요. 받는 것은 좋은데, 바치는 것은 왜 이리 어려울까요? 이런저런 변명 어린 대답의 가장 저변에 앉아 있는 것은, 내가 중심에 있으며 대접받고 싶은 마음, 바로 이기성이 아닐까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부르는 사람이나 작사자를 비난할 의도는 아니지만, 이 부분의 가사가 가진 부작용은 논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에베소서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힌트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닌, 이미 사랑을 받았기에 태어났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존재의 목적이 아닌 우리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원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기에 태어났고, 은혜를 받고 있기에 현존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여러 차례 강조합니다. 그 은혜가 앞으로 계속될 것으로 말하는 한편, 그를 받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받는 것을 목적으로 생각하면 항상 받고자 하는 이기성을, 그리고 그 후에는 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과 불행감을 키워가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지 않아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과 은혜를 헤아리지 않거나, 누리지 않고 있거나, 망각하기 때문에 불행합니다.
“교회는 …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3). 하나님의 충만케 하심을 인식하면서 시작하지 않으면, 우리는 밑 빠진 독과 같습니다. 채워질 수 없으면서도 채워지기를 바라면서, 요구하고 또 요구하죠. 그리스도의 몸이며 충만 그 자체인 교회가 흔들리는 주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못 성립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으로 인해 이기적인 행동을 ‘포용’해주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입니다.
우리는 사랑, 포용, 자유, 평화와 같은 미덕이 강조되는 현대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감동적인 이야기, 서로 나누며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흔히 접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 종교의 공통된 가르침으로 세어지며 모든 종교가 사실상 같은 곳으로 가고 있다고 하는 대범한 주장의 근거가 됩니다. 마치 기독교적 가르침도 같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한 부분만 생각하면서 속지 않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이며 인간의 삶의 목적으로 재차 강조된 하나님께 대한 찬양은 이들이 추구하는 공통적 미덕에 들지 않습니다.
특정한 신에 대해서나 신의 가르침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유일신 종교의 가르침이 아닌 무신론이나 범신론, 다신론이 공유하는 가치관임을 주의하십시오. 이미 이런 시류에 물든 시각으로 인해 굳이 ‘편협한’ 유일신을 섬기지 않고 공통적 미덕을 실천하며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지혜와 계시의 영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확신하는 데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섬기는 신, 혹은 섬기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현대 성경신학자 G. K. 비일(Beale)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경배하는 것을 닮아간다 (We become what we worship). 그는 먼저 이사야 6장을 통해,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 우상과 똑같은 종말을 맞이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다른 부분을 보면서, 다만 결말이 같을 뿐 아니라 가치관과 성품도 같아진다는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인간의 모방하는 성격, 닮아가는 성격으로 인해 각 개인은 그가 바라보며 섬기는 것과 비슷해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그런 것처럼 하나님의 깊으심을 끊임없이 묵상하며 그분을 섬길 때, 우리는 우리의 나아갈 방향을 알게 되며 그 길이 계속 넓어짐을 경험합니다. 자신을 희생함에도 기뻐하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 기쁨과 평안을 더 깊이 체험합니다.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 아버지를 알고,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을 닮아가면서 그분과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인간이 고안해 낼 수 없는 특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특권과 기회마저 스스로가 쟁취해야 할 압박감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나는 못 하고 있다는 좌절감이나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 때 에베소서 1장의 다른 부분을 보십시오. 먼저 뜻을 세우시고, 그리스도의 보혈과 약속의 성령을 통해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선택할 때, 뜻을 시작하신 분이 이루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기업으로 먼저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면류관을 ‘만들어’ 바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찬양의 마음이 들지 않을 때라도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우리에게 크신 뜻을 베푸시되, 그것을 “즐거이” 하신 그분을 바라보다 보면, 우리의 마음도 즐거운 찬양이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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