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적목리 복원” 유언 남기고 떠난 신우균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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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 박사(삼육대 명예교수)
향년 85세, 적목리 생존자 중 막내둥이인 신우균 목사가 지난 6월 15일 우리 곁을 떠났다. 지난달 23일 삼육서울병원 추모관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시신을 화장한 뒤, 유골을 미국으로 이송했다. 현지시각으로 지난 8일 5년간 목회하시고 은퇴 후 출석했던 북가주 새크라멘토교회에서 추모예배를 진행했다. 고인은 5~6세 때 부모를 따라 적목리 심산계곡으로 피신해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한국에서 16년, 미국에서 40년 모두 56년의 목회를 마치고, 고국에 귀국해 동중한합회 양구 해안교회, 인제 미산교회 및 고성 본향교회를 목회자로 2023년 5월까지 섬기셨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노구를 이끌고, 미약한 교회들을 찾아 안식일 설교와 오후 방문했다. 양구 해안교회에는 본인의 5000만 원과 딸이 보낸 2만 달러로 8000만 원의 건축헌금을 드렸고, 속초 남부교회에는 본인이 교회 의자 교체와 액정 비용 2000만 원을 헌신했다. 일생 병원 한 번 가보지 않으실 정도로 건강했던 분이 갑자기 발병해 삼육서울병원, 아산병원 그리고 인천 길병원에서 심지어 병명도 나오지 않는 채 운명했다.
쓰러지시기 전 몇 달 동안 고인은 필자에게 적목리를 복원하라고 수차 말씀하셨다. 특히 적목리 땅을 확보하고, 필요한 시설을 갖추라고 강조하셨다. 독지가가 땅을 확보할 수 있는 자금을 교회에 기증할 것이니 염려말고 추진하라고 거듭 부탁하셨다. 이런 유지를 받들어, 고인의 사후 유족들은 삼육대 교내에 적목리 기념관 건립과 땅 확보 후의 현장 경비 등 적목리 기념사업을 위해 20억 원의 발전기금과 외국인장학기금으로 5000만 원을 기탁했다. 발전기금 전달식에는 고인의 아내 문정자 사모, 처제인 문정희 장로와 유제성 원장(삐땅기의원 대표원장), 딸 내외 신현숙 사모와 김정도 장로 등 손자녀, 친척 20여 명이 참석했다.
적목리 신앙공동체
그는 적목리 신앙공동체의 창시자이자 지도자 중 한 분인 신태식 목사의 차남이다. 이 공동체는 일제강점기 말엽 당시 하늘 아래 첫 동네로 불렸던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 심산유곡에 70여 명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이 피신해 공동생활로 폭압적인 일제의 제국정책을 목숨을 걸고 거부했던 곳이다. 어떤 기관이나 조직 또는 교회의 도움 없이 풍찬노숙(風餐露宿)하고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면서도, 종교탄압과 강제징병과 징용을 피해 전국에서 찾아오는 청년과 가족들을 조건 없이 뜨겁게 환영하고, 자급자족의 삶을 훈련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기도했다.
지도자들은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고, 사선(死線)을 넘어 전국 각지 교인들을 찾아 다니면서 민족계몽과 전도 활동을 펼쳤다. 적목리 신앙유적지는 1943년 9월부터 1945년 해방되기까지 만 2년 동안 일제의 제국정책을 목숨을 걸고 거부하며 신앙을 지켰다. 적목리 공동체는 만난(萬難)을 극복하고 신앙 양심과 민족정기를 지킨 한반도 내의 유일한 공동체 유적지로 가평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됐다(가평군 향토문화재 13호[1999년 12. 31]; 13-1, 2호[2015. 12. 2]). 이곳은 항일 신앙 역사의 현장으로, 로마제국 시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걸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피신했던 로마의 지하동굴 카타콤(Catacomb)과 유사하다. 또한 중세시대 험준한 유럽의 알프스 산속에서 모든 것을 희생하며 진리와 자유를 수호했던 왈덴스(Waldenses) 유적지와 같이 세계의 자랑거리이다. 이 유적지를 복원하는 것이 시대적 소명이다.
다목리 가는 길
다목리는 나무가 많다는 뜻의 동네 이름이고, 적목리는 붉은 나무골이라는 뜻이다. 껍질과 속이 붉은 주목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신태식 목사 가족이 적목리 공동체로 가기 전 기거했던 곳이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이다. 이곳을 확인하기 위해 몇 차 답사한 적이 있지만, 심지어 살아생전 신우균 목사와 함께 시도했지만 확인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 신 목사의 부음을 듣고 고인의 누나인 신선옥 집사(89세)께서 방한하셨다. 이 기회를 이용해 신태식 목사께서 사셨던 다목리를 찾아 보고자 다시 계획했다.
지난 7월 7일 아침 일찍 신선옥 집사를 모시고, 신태식 목사의 둘째 딸 신선희 집사의 딸 강충숙 집사, 신태식 목사의 셋째 딸 신선영 집사의 딸 엄기경 집사와 남편 최익종 장로(북아태지회 대총회 감사 후 퇴임)와 함께 다목리를 향했다.
먼저 신우균 목사의 출생지였던 화천군 상서면 산양리 111번지를 몇 번의 군 초소를 거쳐 찾아갔지만, 울창한 숲이 뒤덮여 있고 일대에 민가가 없어 다목리를 찾아갔다. 수소문 끝에 주민센터를 찾아 나이 많으신 경로회장을 만났다. 신 집사가 80년 전 다목리에서 적목리로 옮겼을 때의 사정을 말했다. 집 옆에 광산이 있었고, 동생인 신 목사와 함께 산에 올라 광산의 인부가 땅속에 묻어둔 장갑 속의 금광석을 주운 것이며, 앞 개울을 이야기하니, 그 장소는 휴전선 근처로 개발이 되지 않아 지금도 그대로 있다고 했다.
경로회장의 인도로 황우광산 입구와 거기서 약간 떨어진 산기슭의 가옥, 그리고 앞에 흐르는 시내 등을 확인했다. 또한 이웃 주민도 동일하게 그것을 인정했다. 모두 숲과 나무가 무성해 접근이 어려웠지만, 80년 전 살았던 집의 위치가 대략 확인되자 신 집사는 어린아이처럼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고, 강 집사는 “엄마, 엄마” 하며 목 놓아 어머니를 불렀다.
당시 신태식 목사는 50명~250명의 인부를 거느린 목상이었다. 전설로만 들어왔던 황우광산은 강원도에서 당시 제일 큰 광산으로, 채광량이 많아 그렇게도 많은 인부가 필요했다. 신태식 목사는 지방 유지로 아래 네 동생들(태복, 태흥, 태섭, 태범)이 강제징병과 집용 대상이었고, 딸 신선희와 신선영이 모두 정신대에 끌려갈 나이였기 때문에,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외 딴 곳에 살았다. 어느 날 일제와 친한 동네 구장이 일경의 급습 계획을 알렸다. 그 즉시 모든 세간살이 일체를 두고 미숫가루를 준비해 몸만 황급히 빠져나왔다. 정말 숨 막히는 공포의 수색과 체포를 피해 신태식 목사 가족은 적목리를 향했다.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했던(히 11:38), 세상이 감당하지 못했던 온 나라와 교회를 위한 신앙행전, 곧 적목리 공동체의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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