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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월호 2023년 11월호 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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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교회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임재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이 물으셨다. “더러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라 하나이다.” 제자들이 대답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께서 물으셨다(마 16:13~15).

나의 정체성과 여러분의 정체성 그리고 모든 사람의 정체성이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이 질문에 달려 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대답은 옳았다(마 16:16).

나사렛 예수는 한 인간의 아들로, 평범한 한 갈릴리 여인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다. 먼지 풀풀 날리는 길에서 지나친다면 아마도 그분을 몰라볼지도 모른다. 예수는 평범한 사람 같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보이는 것 그 이상의 존재였다. 그는 신성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이며 “말씀”이셨다. 그는 “하나님”이셨고,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 1:1~2).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요 1:14) 거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의미인 “임마누엘”이라 불렸다(마 1:23). 인간은 참하나님이시고 참인간이신 그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고 그렇게 하여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1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방법대로 곧 첫 인류가 죄를 짓기 전 에덴에서 “날이 서늘할 무렵 동산에 거니”시는(창 3:8) 하나님과 함께 거했던 때처럼 하나님과 함께하지 못하고 있다. 죄가 들어오고 인류와 함께하던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는 극심한 방해를 받게 되었다. 사탄은 일시적으로 “이 세상의 왕”(요 12:31; 14:30; 16:11)이 되었고 죄악, 고통, 죽음을 모든 사람이 겪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로 반응하셨고 하와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부술 것(창 3:15)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가 근원적인 고통을 짊어지고 사탄을 물리쳐 결국 죄악을 소멸하고,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와 영원히 충만하게 함께하신다는 예언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재림 신앙의 핵심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를 성경의 중심 주제로 인지하고 있다.2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라는 명칭에 깊이 새겨진 재림교회 신학과 정체성의 중심이다. 우리 교단 명칭의 일부인 ‘재림’은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과 그 후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살전 4:17) 있을 것이라는 우리 믿음의 정체성을 밝혀 준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출 20:11)와 구원(신 5:15) 사역의 기념으로 예배와 휴식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를 위해 구별된 제칠일 안식일을 강조한다. 

이런 식으로 또 기타 많은 방식으로 재림 신앙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에 대한 희망과 결부되어 있다. 한마디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라는 명칭은 ‘시간’ 속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안식일)와 우리와 함께하실 하나님의 인격적인 임재의 마지막 회복(재림)을 강조한다. 

위의 사실들과 함께 성소 제도는 죄가 들여온 방해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방법으로서 그 맥을 같이한다. 구속의 모든 이야기는 자신의 백성과 함께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궁극적 성취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함께 하나님의 임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재림교회 신앙과 정체성의 세 기둥인 안식일, 성소, 재림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안식일이라는 선물

어떤 이들은 안식일을 짐으로 여기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안식일은 위대한 은혜의 선물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임재라는 선물이다. 그날은 우리가 그분의 사역 안에서 쉬기에 (행위 중심의 종교와 정반대로) 우리가 일할 필요가 없는 날이다. 자크 두캉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넷째 계명에 순종하는 신자들은 은혜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3

안식일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증표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로운 사역으로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데 신자들은 그런 은혜의 사역 안에서 비로소 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에스겔 20장 12절에서 이렇게 선언하신다.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나님께 속해 있고 그분에 의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나타내는 증표가 된다. 동시에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셨고 또 행하고 계시는 사역 안에서 쉬라고 사람들을 부르는 날로서 우리의 가치나 정체성을 생산성이나 성취에 두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안식일은 또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기억하는 구원의 날이다(신 5:15). 이사야 58장은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 하게 하고 모든 멍에를 꺾”으며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자기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를 피하여 숨지 말라고 호소함으로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라는 맥락에서 안식일을 조명한다(사 58:6~7). 이런 일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행한다고 비판을 받았던 일들이었다(마 12장; 요 5장; 눅 4:18~19과 비교). 무엇보다 『시대의 소망』 ‘안식일’ 장에서 엘렌 화잇은 이렇게 기록했다. “거짓 종교마다 그 신봉자들에게 인간의 필요, 고통, 권리에 대하여 무관심하라고 가르친다.”4 

이런저런 방식으로 안식일은 용, 사탄을 따르는 이 세상의 권력에 맞서 그것을 넘어서는 이타적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의 증표가 된다(계 12~14). 안식일은 그와 같이 시간 속의 성전이 된다. 창조주이자 공급자이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기뻐하도록 관계와 휴식을 위해 하나님이 따로 구별해 놓으신 날이기 때문이다. 

근심과 심신의 탈진을 조장하는 성취에 사로잡힌 세상과 대조적으로 안식일은 우리의 일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경축할 시간 다시 말해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 내기 위해 애쓰고 좇는 대신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을 기뻐하면서 그분과 교제하며 그분 안에서 쉴 시간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사람들이 점점 더 외롭고 분주하고 근심하며 괴로워하는 시대일수록 그런 신성한 시간은 몹시 소중하다. 

무엇보다 안식일은 하나님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흔들림 없이 오롯하게 관계를 유지하는 귀한 시간을 제공한다. 얼마나 큰 선물인가!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이렇게 초청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성소에 담긴 복음

성소는 시간 속의 성전인 안식일과 나란히 서 있다. 지상의 성막과 성전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영원히 화해시키기 위해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중보하시는 하늘 성소를 예시한다(히 8:1~2; 9:11~12). 

이것은 엄청난 복음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아직도 이것이 얼마나 좋은 소식인지 잘 모르고 있다. 

성소를 생각하면서 긍정적이지 않은 관점에서 심판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일견 수긍이 간다. 우리 대부분은 재판받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이 필요한 사람에게 재판은 정말 매우 좋은 소식이다. 그것은 잔인하고 억압적인 용의 길을 물리치고 제거할 어린양의 온전한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평결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상상해 보라. 모든 것이 거기에 달려 있다. 그 평결은 좋은 것일까? 아니면 나쁜 것일까? 기다리는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진다. 마침내 평결이 났다. 모든 혐의가 유죄다. 가해자는 전액 배상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 사람은 정신이 나갔을까 아니면 기뻐 어쩔 줄을 모를까? 그것은 그 사람이 재판에 회부된 장본인인지 아니면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의 피해자로서 절박하게 배상을 바라고 있는 사람인지에 달려 있다.

후자의 경우라면 그 사람과 가족은 뛸 듯이 기뻐할 것이다. 정의가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그들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것이다. 구원이 재판을 통해 온 것이다. 

성경에서 심판은 악의 희생자들에게 정의와 구원을 가져다주는 놀라운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신실한 자들은 하나님께 심판을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는다. 왜 심판을 하느냐고 하나님께 묻거나 그것을 피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오히려 종종 왜 하나님께서 더 속히 그리고 더 확실하게 심판하지 않으시는지 궁금해하는 것이다.

성소의 절차를 따라 하나님은 마침내 정의를 실현하실 것이다. 성소의 심판을 통해 하나님은 구원받기를 원하는 모든 자가 그분과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심으로 자신의 성품을 옹호하시고 또 우리를 위한 속죄를 이루실 것이다. 

이 놀라운 소식은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용(사탄)과 그의 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어린양의 이타적인 사랑의 길을 따를 것인가? 그대의 충심은 어디에 있는가? 그대는 누구와 같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중보가 없다면 우리는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심판하는 권세가 그리스도께 주어졌고(요 5:22) 그분은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요일 2:1), 구원자요 주인이신 그분께 존재의 바탕을 두고 있는 모든 사람의 변호인으로 서 계신다. 그분 없이 그대는 승소할 수 없다. 그러나 그분과 함께라면 절대 패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모든 피조물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적 임재의 완전한 회복에 필요한 화해를 이룬다. 그분은 그대의 개인적 구원을 위해서뿐 아니라 우주 안의 모든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영원한 이타적 사랑의 왕국을 이루기 위해 일하신다. 그대가 그분을 부른다면 그분은 그대를 구해 주실 것이다. 그분은 그러기에 충분하시다. 엘렌 화잇은 이렇게 진술했다. “비록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무덤에서 일어날지라도 예수님을 소유한다면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날을 견디기 위해 그대가 요구해야 할 모든 것은 오직 주님뿐이다. 그걸로 충분하다.”5

용과 그의 추종자들은 마침내 유죄 선고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악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이타적인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두 용서받고 깨끗함을 입을 것이다(요일 1:9).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외칠 것이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계 15:3~4). 

필자가 감히 묘사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방식으로 성소 제도는 우리를 위한 또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사역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구속받고 변화되어 그분과 영원히 함께 지내게 된다.


재림이라는 위대한 소망

이제 재림이라는 위대한 소망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앞에서 언급했듯 ‘재림교회’라는 이름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며 준비하는 백성임을 확인시켜 준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 뒤 하나님은 다시 우리와 함께 ‘머무신다(tabernacle)’(계 21:3).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며,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이나 우는 것이나 아픈 것이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니, 이는 처음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다”(계 21:4, 바른).

그동안 재림교회는 하나님과 다시 온전히 함께할 것을 준비하면서 세상으로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예비하도록 돕기 위해 세 천사의 기별을 선포할 책임을 부여받았다(계 14:6~12). 무엇보다도 세 천사의 기별은 이기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바꾸고, 예배를 강요하고, 세계를 지배하려는 용의 방식이 어떻게 이타적 사랑의 길 즉 어린양의 방식과 정반대인지를 밝히 조명해 준다.

재림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적 임재는 마침내 완전히 회복될 것이다.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원래 의도하신 대로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모험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던 것만큼 즉 하나님이 육신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던 것만큼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신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더 이상 악이나 고통이나 죽음이 영원히 없게 될 그런 날이 올 것이다(계 21:3~4; 고전 2:9).

재림 기별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놀라운 신학이다. 거기에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와 구속의 이야기가 서로 깊이 얽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와 다시 함께하신다는 위대한 기쁨과 희망과 사랑의 기별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보여 주고 놀라운 소식으로 가르쳐야 할 뿐 아니라 그에 합당한 삶을 살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리스도에게 뿌리박은 정체성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준비하면서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던지시는 질문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여러분은 그분을 누구라고 말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은 그분의 정체성과 관련될 뿐 아니라 여러분의 정체성과도 연관이 있다. 인지하든 못하든 그분은 여러분의 창조주이자 모두의 주님이시며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이름이시다(행 4:12).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여러분은 이미 무한히 가치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자신과 함께하는 훨씬 더 깊은 관계로 초청하신다.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것이며 그에 따르는 모든 상속의 권리를 얻은 것이다(롬 8:15~17). 그것이 여러분의 궁극적인 정체성이다.

재림교인의 믿음은 하나님의 임재를 중심으로 삼는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산 자로 생각하고(롬 6:11),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정체성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뿌리박고 있다. 그분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장차 오실 분이다. 만물이 그를 통하여 창조되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주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지금은 하늘 성소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해 봉사하고 계시는 분이다. 자기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을 자기와 함께 하늘 집으로 데려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있게 하실 분이다. 소망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 뿌리박은 하나님의 자녀가 곧 우리의 정체성이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늘 명심하고 끝까지 재림 신앙을 따라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1 자세한 사항은 다음을 참조할 것. John C. Peckham, God With Us: An Introduction to Adventist Theology (Berrien Springs, MI: Andrews University Press, 2023)

2 참고. J. Scott Duvall and J. Daniel Hays, God’s Relational Presence: The Cohesive Center of Biblical Theology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9)

3 Jacques Doukhan, “Loving the Sabbath as a Christian: A Seventh-Day Adventist Perspective,” The Sabbath in Jewish and Christian Traditions, ed. Tamara Cohn Eskenazi, Daniel J. Harrington, and William H. Shea (New York: Crossroad, 1991), 155

4 엘렌 G. 화잇, 『시대의 소망』, 286

5 엘렌 G. 화잇, 『복음전도』, 243~244



존 페컴 『애드벤티스트 리뷰』 사역 부편집인이며 앤드루스 대학교 신학 및 기독교 철학 연구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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