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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이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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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월호 2023년 11월호 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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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 받는 정체성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아마도 우리 자신에게 물을 수 있는 가장 복잡한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대답하려면 많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누군가는 “나는 아랍 소녀입니다.” “나는 독일 선수입니다.” 또는 “미국 북부 출신 경찰관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아랍 소녀는 매우 일반적인 설명이며 개인의 상황에 대해 제한된 정보를 제공한다. 그는 두바이의 모슬렘 공주일 수도 있고, 이집트 그리스도인일 수도 있고, 시리아 난민 소녀일 수도 있다. 독일 선수는 어떨까? 부모가 토고 출신인 요루바 민족의 나이지리아인일 수도 있다. 어쩌면 두 가지 시민권을 지닌 귀화 독일 축구 선수일지도 모른다. 미국 북부 출신 경찰은 뉴욕에서 일하는 무신론자로서 방금 마친 DNA 검사로 자신이 네덜란드인, 아메리카 원주민, 흑인 아프리카인, 아일랜드인 및 몽골인의 유전을 지녔음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의 정체성은 시민권, 생물학, 지리, 종교, 문화, 직업 등 다양한 측면으로 설명될 수 있다. 


정체성의 다양한 측면

정부와 지역 사회가 우리를 인정하는 방식은 대부분 우리의 선택 범위를 벗어난다. 생물학적 특성과 사회 구조 측면에서 보면 우리의 정체성은 태어나기도 전에 영향을 받고 형성된다. 나이가 들수록 정체성을 강화할 기회가 늘어난다. 우리의 정체성에 포함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데 교육과 사회적 영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디에 살며 얼마나 많은 자유를 누리느냐에 따라 우리는 특정한 설정 사항에 도전하며 우리의 정체성을 바꿀 수도 있는 힘든 선택을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종교, 정치적 성향 심지어 국적 변경도 포함된다. 상황이 어렵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박해받는 종교 난민은 모국의 가혹한 대우 때문에 자신의 국가 정체성을 바꾸기로 선택한다.

자신의 사회·문화적 정체성의 일부 측면은 한 발 물러서서 다른 문화와 비교할 때 더 잘 이해되기도 한다. 나는 브라질에서 태어났지만 조국을 떠난 뒤에야 브라질 문화 유산의 심오한 측면을 깨닫고 다른 관점에서 나의 정체성을 볼 수 있었다. 독일인, 라틴계(포르투갈 및 스페인 배경)와 교류하면서 내가 지닌 게르만·라틴 문화적 특성을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모국을 떠나 생활하다가 정체성의 위기를 겪을 수도 있다. 위기는 자신의 문화에 더해 새로운 문화의 일부를 채택할 때 발생한다. 가치관이 충돌할 때도 있다. 이러한 가치의 대부분은 옳고 그름에 관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일을 수행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예를 들어 의사소통 방식이 섬세한 문화권의 사람은 직설적인 성향이 강한 문화권 사람들의 이야기 방식을 무례하게 여길 수 있다. 우리의 가치가 도전받으면 정체성도 도전받는다. 


창조에 기초한 정체성

성경을 지구와 개인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보여 주는 계시로 믿는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여긴다(창 1:26~27; 롬 8:16). 자신을 하나님에게 지음 받아 지식과 행복 안에서 자라 가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성경적 진리를 받아들일 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바뀐다. 특정 지역의 시민이거나 특정 종족 그룹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근본적인 정체성은 인류 역사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완전하게 회복하기 위해 행하셨고 행하실 일에 대한 성경의 장엄한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에게는 어떻게 더불어 살고 서로를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적인 행동 규범과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특정 지역의 시민이거나 특정 그룹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근본적인 정체성은 인류 역사의 장엄한 성경적 서사에 그리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실 일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함께 어우러져 살기 위한 윤리적 규범과 이상이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의 장엄한 서사는 예수께서 세우러 오신 새 왕국의 개념을 담고 있다. 그 왕국의 토대는 사랑, 정의, 존중, 자유이다. 심지어 자유에 관한 문제에서도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상과 율법이 우리 삶의 행동 기준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표준을 선택하는 이유는 우리의 취향과 선호도를 초월해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 그분이 가장 잘 아시기 때문이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정체성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이해를 초월하여 우리의 이해를 다잡아 주는 새로운 차원의 정체성을 부여하신다.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겔 36:26, 공동).



인간 정체성에 대한 왜곡된 견해

정체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타인을 사랑하고 존중하도록 이끌 것이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정체성의 차이에 기초해 고정관념을 형성하고 차별을 자행할 때 끔찍한 일들이 생긴다. 이런 일은 인종, 피부색, 종교적·정치적 소속과 관련하여 발생한다. 인류는 언제나 차별할 이유를 찾는 것 같다. 차별의 바탕이 되는 악한 본성을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각 문화마다 자신의 이웃과 외국인을 상대로 끔찍한 일을 저질러 왔다. 

정체성의 특정 측면에 대해 배웠을 때 나는 처음에 인종 차별을 서로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로 이해했다. 나는 그것을 모국에서 목격했다. 그런데 21세 때 자원봉사자로 아프리카에 갔는데 고국에서 보았던 피부색에 따른 차별만큼이나 아프리카에서 특정 부족 사이에 차별이 있음을 발견했다. 충격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실제로 르완다에서는 대량 학살이 발생했다. 총 국토 면적이 남한의 4분의 1 수준인 2만 6,338m2로 아주 작은 이 나라에서 두 주요 민족 집단이 충돌했고 80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1 당시 이 나라의 인구는 약 700만 명이었다.2 최소한 인구의 11%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예일 대학교에서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대량 학살로 최고 14%가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3

이 비율을 미국 인구에 적용하면 1년도 안 되어 무려 미국 인구 4,600만 명이 사망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적용한다면 840만 명, 한국의 경우 700만 명이 넘는 수이다. 인간 정체성에 대한 왜곡된 견해를 받아들일 때 서로에게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다. 이런 일은 과거에도 일어났고 현재도 곳곳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


그리스도를 뿌리 삼아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라. 그분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함께 어울리며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셨다. 유대인은 이웃 사마리아인을 차별하여 그들과 대화조차 하지 않았다. 그 직접적인 책망으로 예수님은 누가복음 10장 25~37절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진정한 이웃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종교 지도자들조차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 그분은 차별받는 사마리아인을 친절과 사랑의 모범으로 부각시키셨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인들을 대하셨던 모습을 엘렌 화잇은 『시대의 소망』에서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허시고 세상에 구원을 전파하기 시작하셨다. 그분은 유대인이었지만 사마리아인들과 자유롭게 어울렸고 유대 바리새인의 관습을 무시하셨다. 그들의 편견에 맞서 예수께서는 멸시받는 이들의 친절을 받아들이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지붕 밑에서 주무시고, 그들의 식탁에서 그들이 손수 마련하여 내놓은 음식을 드시고 거리에서 가르치셨으며 가장 친절하고 정중하게 그들을 대하셨다.”4

국가적·공동체적 정체성을 지니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우리는 고립되어 살 수 없다. 유사한 문화적·사회적 정체성을 지닌 집단의 일부가 바로 우리이다. 문제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학대하고 홀대할 때 일어난다. 우리의 정체성이 기독교 가치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결코 율법을 어기지 않으셨다. 사실 그분은 남을 미워하는 것이 마음으로 죄를 범하는 것임을 드러내면서 율법의 표준을 높이셨다(마 5:21~22).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원래 계획과는 다르게 오염되고 뒤틀렸다. 그러나 희망이 있다. 우리가 지향하는 정체성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으신 분을 믿을 때 생기는 희망이다.

기계를 계속 잘 작동시키려면 기계를 가장 적절하게 사용하도록 일러 주는 설명서를 따라야 한다. 이제 그 기계가 내 것이므로 내 맘대로 조종하고 관리할 수 있다고 말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매뉴얼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관리하는 사람의 비행기를 타고 싶은가? 나의 요점을 이해했을 것이다. 원리는 동일하다. 창조주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다. 그분은 또한 원수가 그분의 원래 창조물을 손상시켰다는 것도 알고 계신다. 다행히 우리는 상황을 바로잡기로 선택할 수 있다. 그분은 우리 안에 새로운 정체성을 재창조하고 각인시키고자 하신다. 미워하는 마음이 사랑의 마음으로 변화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요일 4:7, 새번역).

창조주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더 이상 복잡하지 않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개정).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나? 그렇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신 뒤에 그분은 또 말씀하셨다.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계 21:5).



https://www.britannica.com/event/Rwanda-genocide-of-1994

https://www.un.org/en/preventgenocide/rwanda/historical-background.shtml

https://gsp.yale.edu/case-studies/rwanda-project

4 엘렌 G. 화잇, 『시대의 소망』, 193


로널드 쿤 대총회 선교부 부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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