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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라소의 반군, 반란 그리고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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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월호 2023년 3월호 재림교회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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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역경조차도 사용하신다

퀴라소의 반군, 반란 그리고 기적



네 사람이 베네수엘라의 항구 도시 라과이라에 정박한 선박, S. S. 반 렌셀라어르호를 향해 걸었다. 윌리엄 백스터 카리브연합회장1, 찰스 나이트 총무 겸 재무, 프레드 스티브스 선교부장, 문서전도자 페드로 사노이아가 베네수엘라 마라카이보 호수의 정북 방향에 있는 카리브해의 네덜란드령 섬 퀴라소로 선교 여행을 떠나기 위해 배에 올랐다. 그때가 1924년 7월이었다.


이튿날 도착하자 그들은 섬을 가로지르면서 신앙 서적을 판매하며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1년쯤 뒤 찰스와 그의 아내 데버라가 퀴라소로 이사했다. 데버라는 진정한 개척 선구자였다. 남편이 베네수엘라를 오가는 동안 데버라는 그 섬에 남아 있었다. 그는 경험 많은 목사처럼 설교했고 성경을 가르치며 방문을 다녔다. 또 아직 아무도 침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신자였던 작은 무리의 모임을 조직했다.2 2년간의 힘든 수고의 결실로 퀴라소에 교회가 생겼다.


나이트 가족은 그 섬을 떠났고 데이비드 배브콕과 그의 아내가 적은 신자 무리를 돌보기 위해 부르심을 받아들였다. 이들에게는 예배 장소가 필요했다. 그들은 이곳저곳을 너무 많이 돌아다녔다. 1929년 3월, 의미 깊은 금식과 기도 후에 데이비드는 교회를 지을 작은 부지를 달라고 정부에 청원했다.3 이 일이 성사되려면 기적이 생겨야 했다. 그들은 계속 기도하며 자신들의 필요를 주님께 내놓았고 하나님께서는 낯설면서도 극적인 방식으로 응답하셨다. 


예상 못한 방법

1929년 6월 8일 토요일 저녁4 라파엘 시몬 우르비나의 지도 아래 베네수엘라 반군 약 45명이 탄 트럭 두 대가 퀴라소에 와서 폭력으로 총독을 사로잡았다. 라파엘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군인들의 움직임을 포함해 퀴라소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5 그는 1년 전에 체포되어 그곳에 수감된 적이 있었다. 모범적으로 처신한 덕에 라파엘은 포르트 암스테르담에서 허드렛일을 할 수 있었고 군대의 움직임과 일상을 충분히 관찰할 시간을 가졌다. 그는 무기가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를 알았다. 


라파엘이 갇혀 있을 때 셸 정유소에서 일했던 베네수엘라 동료들이 파업했다. 그들은 그 항구에 수감된 베네수엘라 죄수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항구를 책임지고 있던 경비대장은 라파엘에게 파업한 지도자들을 설득해 주길 요청했다. 라파엘은 자신을 베네수엘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어야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와 베네수엘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라파엘은 그들이 자신을 베네수엘라로 돌려보낼 것을 알았다. 이것은 그의 인생이 끝나는 것을 의미했다. 정유소에서 일어난 파업으로 그는 원하는 결과를 얻었고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은 그를 다른 나라로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콜롬비아로 갔다.


라파엘은 퀴라소 정부에서 받은 자신의 처우에 감사하지 않았고 언젠가 그들에게 교훈을 남겨 주기로 결심했다. 그는 거의 1년을 준비했다. 6월의 습격이 있기 8일 전에 라파엘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된 멕시코 여권을 사용해서 퀴라소에 왔다. 동료들이 부두에서 기다렸다가 같은 동료가 기다리고 있던 정유소 옆의 작은 집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습격을 위한 계획을 마무리했다.


라파엘과 동료들은 마체테 칼과 권총으로 무장하고 항구 수비대를 공격해서 네덜란드 군인 3명을 살해했다. 군대의 저항에도 반란군이 승리했다. 


라파엘은 총독 레오나르드 프라위티어르에게 자신과 동료들이 배로 떠날 수 있도록 섬 밖으로 나가는 길까지 동행하도록 요구했다.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유소에 불을 지르겠다고 했다. 그것은 섬에 엄청난 비극이 될 것이다. 자정이 조금 지난 뒤에 총독과 다른 사람들은 죄수들을 데리고 베네수엘라로 향하는 선박 마라카이보호에 올랐다.6


선장 아르투르 모리스는 소요가 일어났을 때 승무원이 모두 도망쳤기 때문에 통과 승인 서류와 승무원 한 명이 같이 가지 않으면 항구를 떠날 수 없다고 맞섰다. 라파엘은 선장에게 그 서류들을 작성하게 하고 총독을 총으로 위협해서 거기에 서명하게 했다. 


항해 도중에 모리스 선장7은 반란 세력들이 총독을 살해해 바다에 버리려 한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선장은 라파엘에게 그것은 큰 실수라고 귀띔했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이 포로로 잡아 둔 총독은 라파엘이 감금되었을 당시의 총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총독은 이미 네덜란드로 돌아갔고 이 총독은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는 사람이라고 모리스는 설명했다.


그의 충고에 마음이 흔들린 라파엘은 베네수엘라 코로에 자신과 동료들을 내려 달라고 했고 이후 총독과 나머지 죄수들은 그 배를 타고 퀴라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여행은 반란군에게 아주 유감스럽게 종결되었다. 그들은 베네수엘라 군대에 체포되어 투옥됐다.


새 지평

마라카이보호가 돌아오자 그 섬과 정부에 일어났던 유감스러운 일은 종결됐고 부지 마련을 위해 애쓰고 있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역경조차도 사용하신다. 


집무실에 돌아온 총독 프라위티어르는 모리스 선장을 불러 자신의 목숨을 구한 일에 감사를 표하며 합당한 요청이면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고 했다. 모리스 선장의 아내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이었고 그는 항구에 있을 때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아내와 함께 예배에 참석하곤 했다. 교인들이 교회 부지를 얻기 위해 고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모리스 선장은 총독에게 재림교인들의 청원에 따라 그들이 자신들의 교회를 지을 땅을 얻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두 달 뒤 부지 1,200제곱미터가 재림교회에 양도됐다. 1930년대 초에 목회자 사택이 딸린 첫 번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바로 그곳에 세워졌다. 교회는 기도로 연합했고 그렇게 빠르고 뚜렷한 방식으로 그들의 간구에 응답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렸다.


1 그 당시 카리브연합회에 해당하는 지역은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파나마, 베네수엘라, 가이아나, 수리남, 프랑스령 가이아나, 소앤틸리스 제도이다.

2 1991년 데이지 라베가의 인터뷰에 기초했다.

3 배브콕 목사에게 보낸 편지 사본을 필자가 소장하고 있다.

4 그 당시의 신문들 중 Amigoe, La Union, De Curaçaosche Courant는 이 사건을 대서 특필했고 신문 사본은 퀴라소 빌렘스타트 앤틸레스 네덜란드 국립 기록관에 보관되어 있다.

5 Urbina, Rafael Simón, Libertad, Dolor y Tragedia, 1936

6. 마라카이보호는 같은 날 아루바에서 1등석 승객 15명, 2등석 승객 9명과 갑판에 113명을 태우고 막 도착한 참이었다. 참조 De Couraçaosche Courant, June 14, 1929

7 모리스 선장은 재림교인인 아내와 다른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예민한 사항이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말할 수 없었다. 


대니얼 A. 두피스  오랫동안 목사, 행정자로 일했고 교회사에 관한 책 여러 권을 저술했다. 

찰스 나이트, 퀴라소에 파송된 최초의 선교사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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