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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변화의 원동력

본 기사는 2019년 9월 13일 리빙 호프 재림교회의 설교를 정리한 것이다. 구어체 형식을 그대로 유지했다. -편집실


유명한 감리교 설교자인 존 웨슬리는 거의 절망에 빠졌다. 계속 말씀을 전파할 확신이 없었다. 지친 데다 건강도 약해졌다. 죽음이 눈앞에 닥쳤을 때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신의 신앙에서 위안을 찾지 못했다. 그는 사역을 멈출 준비가 되었다고 친구에게 털어놓을 정도였다. 1738년 5월 24일 새벽 5시에 그는 성경을 펴서 읽다가 베드로후서 1장 4절의 말씀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나니 이것은 너희가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벧후 1:4, 킹흠정). 여러분이 절망에 빠져 있거나 가장 깊은 시련을 겪을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격려하기 위해 그 순간에 필요한 바로 그 성경 구절로 여러분을 인도하셨음을 알아차린 적이 있는가? 웨슬리의 마음속에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웨슬리는 런던의 올더스게이트 교회에서 열리는 모임에 마지못해 참석했다. 어떤 사람이 루터의 유명한 『로마서 서문』을 낭독하고 있었다. 존 웨슬리는 그날 밤 그 소박한 예배당에 앉아 말씀에 완전히 몰입되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8시 45분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이루시는 변화를 서술하는데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진심으로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 의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분께서 진정 나의 죄를, 나의 죄까지도 취하셨다는 사실과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내게 이르렀다.”1 

로마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이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하여 무엇을 가르쳐 주는지 생각해 보자.


무엇을 따라 걷는가?

로마서 8장 1절은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 정죄라는 말은 선고에 따른 형벌을 포함하여 누군가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속박, 정죄와 노예 신세라는 옛 신분에서 구원을 받아 용서와 능력과 자유의 새 생명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그는 계속해서 두 가지 삶의 방식 즉 육신의 삶과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설명한다.

바울이 말하는 “육신을 따라 걷는다”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울은 우리가 ‘살과 피’를 의미할 때 사용하는 그런 단순한 몸의 의미로 육신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바울이 표현한 육신은 실제로 죄에 대한 모든 약함과 취약성을 지닌 인간 본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명령과 사랑이 지배하는 삶이 아니라 죄 많은 인간 본성의 명령과 욕망이 지배하는 삶을 사는 것이 곧 육신을 따라 사는 삶이다. 육신은 인간 본성의 낮은 측면이다. 육신은 죄에 쉽게 물들고 세속적이며 이기적인 본성의 성향, 정욕, 충동 및 욕구와 관련이 있다.

그와 대조적으로 바울은 성령을 따라 걸으라고 강조한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죄 많은 인간 본성, 자신의 정욕과 욕망, 식욕과 정욕에 좌우되었던 때가 있었다고 말한다. 육신을 따라 걷던 상태에서 율법은 죄로 이끌 뿐이어서 그들은 더욱 악해졌고 패배하고 좌절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를 통하여 성령의 강한 능력이 그들의 삶에 임하였고, 그 결과 승리하는 삶으로 들어갔다.


놀라운 발견

바울은 계속해서 작용하는 두 법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을 구별한다(롬 8:2). 죄와 사망의 법이 무엇인가? 그 대답은 로마서 7장에서 찾을 수 있다. 바울은 율법 그 자체는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는 것을 이해하지만(롬 7:12) 그의 삶에는 격렬한 투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로 결심했지만 곧 그의 내면에는 자기 바깥에 있는 법 외에 그 법과 정반대되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23절). 자신의 바깥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네가 선한 일을 하라. 이 선한 일, 저 선한 일을 하라.”고 말하지만 자신의 안에 있는 유전의 법칙 즉 그의 타락한 인간 본성은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타락한 본성의 법에 사로잡혀 의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바울의 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죄의 수렁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것을 발견하고, 이 죄의 법에 속박되고 끌려가 마침내 로마서 7장 24절에서 부르짖는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로마서 7장 9~24절(영어성경)에 ‘나’라는 대명사가 27번 나오며, 성령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눈여겨보라. 8장에서는 장면이 극적으로 바뀌어 성령이 20번 언급되고 ’나’는 단 2번만 언급된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놀라운 발견을 보여 준다. 사람을 의로 인도하는 자기 바깥의 하나님 법과 자기 안에 있는 지체의 법이나 타락한 본성의 유전된 법 외에 또 다른 법이 있다. 그 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이다. 이 법은 자기 의지의 능력으로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의(義)의 법이다. 타락한 본성이 연약하므로 우리 스스로는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이룰 수 없다. 그래서 로마서 8장 3절이 등장하는 것이다.

율법에는 문제가 없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했듯이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 문제는 율법에 있지 않고 나에게 있다. 나 혼자서는 법의 요구 사항을 전혀 충족할 수 없다. 내가 범한 율법에 빚진 자로 나의 죄악으로 인해 정죄받았으며, 나의 죄악 된 본성에 매여 있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이 오셔서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간이 타락한 바로 그곳에서 사탄을 만나셨다.2 예수님은 인류와 마찬가지로 사탄과 싸우기 위해 인간사의 무대에 등장하셨다. 그분은 우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고, 사탄을 물리치러 오셨다(히 2:14~18 참조).


우리의 가장 큰 필요

우리의 가장 큰 필요가 정보였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육자를 보내 주셨을 것이다.

우리의 가장 큰 필요가 기술이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과학자를 보내 주셨을 것이다.

우리의 가장 큰 필요가 돈이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제학자를 보내 주셨을 것이다.

우리의 가장 큰 필요가 즐거움이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능인을 보내 주셨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가장 큰 필요는 죄의 형벌과 권세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주를 보내 주셨다. 

자신의 한계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완전히 깨달을 때, 완전히 무력한 가운데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성령께서 해 주시도록 의지할 때, 모든 생각, 모든 목적, 모든 욕망, 모든 행동, 우리의 모든 식욕과 열정을 그분의 절대적인 통제에 굴복시키면 성령께서 우리 삶을 통제하시고 우리의 본성에 거하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도록 우리를 이끄신다(롬 8:4 참조).

자신의 힘으로 싸우는 한 패할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라면 우리는 정복자보다 뛰어나다(갈 5:16, 17). 우리를 무너뜨리는 생활 습관을 극복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이유는 자신의 힘으로 싸우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정욕과 식욕을 극복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그리스도와 같지 않은 태도를 극복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도 그 때문이다. 정말로 되고 싶은 사람이 되려 하고,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니 그렇게 허둥댄다. 우리 힘으로 적과 싸운다면 매번 패한다. 

더는 속박된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죄 된 속성의 횡포와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옛 율법 아래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가 불가능하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옳은 일을 할 능력이 없다. 의로운 일을 행하려는 바람이 있지만 소망을 이루기에 너무 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반복하여 실패한다. 그렇기에 건강에 해로운 습관과 부정적인 태도를 극복하고 싶지만 계속해서 예전의 습관 패턴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로마서 8장은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소개한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더 이상 좌절된 패배의 삶이 아니다. 더는 속박과 지배의 삶이 아니다. 믿는 자에게 충만히 임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8장은 로마서 전체에서 성령이 논쟁에 개입하시는 첫 번째 부분이며, 성령이 논쟁에 개입하실 때 더는 패배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두 본성 사이의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만 성령께서 통제하시는 곳에서는 옛 본성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성령의 능력 안에 산다고 해서 우리가 어려움에 직면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투쟁에서 승리를 보장받았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성령의 능력

성령은 전능하시다. 성령은 돌 같은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실 수 있다. 파도 앞에서 부서지는 모래성처럼 강철같이 부정적인 습관을 깨뜨릴 수 있으시다. 가장 어려운 일도 쉽게 보이게 하실 수 있으며, 철통같은 반대도 봄눈처럼 녹아내리게 하실 수 있다. 성령은 족쇄를 부수고 감옥 문을 열고 승리의 문을 활짝 여실 수 있다. 모든 골짜기를 메우시며 모든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실 수 있다. 성령은 자주 전능한 일을 행하셨고 또다시 행하실 것이다.

성령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다. 성령의 능력은 선택된 소수의 뛰어난 성도에게만 주어지지 않는다. 성령의 능력은 초대 교회를 위해 1세기에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성령은 주 예수와 같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그분은 여전히 놀라운 일을 행하고 계시며 끝까지 그 일을 행하실 것이다.

예수는 지옥의 통치자와 권세자를 이기셨다. 그분이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성령으로 그분의 능력을 힘입어 승리할 수 있다. 성령을 따라 걷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령을 따라 걷는다는 말은 사도 바울이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 사는 삶을 묘사하기 위해 규칙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성령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 매일 나는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나의 것이라고 마음으로 의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분을 더 알고자 하는 매일의 배고픔이다. 그것은 또한 날마다 하나님께 마음을 쏟는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다.

몇 년 전, 아프리카의 작은 마을이 강력한 성령의 부흥을 경험했다. 마을의 많은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었다. 정욕은 순수함에 자리를 내주었고, 방종은 자기희생으로 바뀌었다. 도둑질은 정직함에 자리를 내주었고, 분노는 친절에 굴복했으며, 탐욕은 베풂에 그 설 자리를 잃었다.

이 아프리카 회심자들에게는 덤불 속에 매일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붓는 장소가 있었다고 한다. 풀이 무성하게 자란 풀밭을 지나 기도의 장소로 가는 길은 발길이 오가며 뚜렷하게 표시가 났다. 누군가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 시들해지면 풀이 무성해진 길이 보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이 분명히 보였다. 그럼 그들은 “형제님, 저쪽에 있는 길에 풀이 자라고 있네요.”라고 말하여 그에게 상기시켜 주곤 했다. 당신의 길은 어떤가? 당신의 길에도 풀이 자라고 있는가? 육신을 따라 걷는다면 우리는 매번 패배할 것이다. 성령을 따라 걸을 때, 그리스도의 임재의 빛에 거할 때 우리는 정복자를 뛰어넘게 된다. 사도는 로마서 8장 37절의 희망적인 말씀으로 로마서 8장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희망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삶의 도전에 맞서는 용기를 준다. 우리는 패배할 운명이 아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바울에게 삶이란 지쳐 패배를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두근두근하고 생생한 기대였다. 그리스도인은 사람들과 섞여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간다. 그 안에서 내면은 자신의 악한 인간 본성과 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죽음과 부패의 세계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은 세상에만 사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산다. 그는 세상만 보는 것이 아니다.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는 인류의 죄의 결과만을 보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능력을 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주안점은 항상 희망이며 결코 절망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기다린다. 


https://www.umc.org/en/content/holy-spirit-moments-learning-from-wesley-at-aldersgate. Accessed February 29, 2024

2 엘렌 G. 화잇, 『시대의 소망』, 49, 25


마크 A. 핀리 오랫동안 전도자이자 TV 진행자로 활동했고 대총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대총회장 특별 보좌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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