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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 기별을 온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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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월호 2023년 4월호 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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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교회 선교 사업 약사 1

재림 기별을 온 세상에 


재림교회 선교 사업 약사1


데이비드 J. B. 트림

 

1901년과 1903년 대총회 총회에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인상 깊은 재조직을 단행했다. 20세기 초 재림교회의 개혁을 논하면서 우리는 주로 행정의 재조직을 이야기할 때가 많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1901년과 1903년에 대총회 임직원으로 선출된 사람들의 정신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서 대니얼스는 1901~22년에 대총회장으로 일했다. 윌리엄 스파이서는 1903~22년에 총무로 일했고 이어 1930년까지 대총회장으로 직임을 다했다. 둘 다 세계 선교에 대한 비전이 있었다. 그들이 함께 지녔던 열정과 대총회 재무, 부회장 및 스파이서가 자기 주변으로 모았던 부장 팀의 열정을 통해 재림교회의 메시지는 미전도 지역과 주민들에게 전해졌다. 자신이 대총회장으로 선출된 1922년 대총회 총회에서 스파이서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 선교 사업은 교회의 정규 업무 이외의 추가 업무가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유일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모든 합회, 모든 교회, 모든 신자의 목표이다.”

그렇게 선교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대총회 지도자들의 집단적인 열정이 재조직에 더해졌다. 이런 요인들이 합쳐져서 극적인 효과가 발생했다. 


온 세상으로

1901년부터 미국 본토에서 선교지로 파견된 신설 교회의 사역자 수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점진적으로 증가했다.


[디자이너 - 도표 삽입]


1909~10년에 그 수는 150명을 넘어섰는데 이것은 1901년에 파견된 수의 3배에 이른다. 새롭게 선교사로 임명받은 이들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정체되었다. 그러나 그다음 1920년에는 이전 10년보다 2배에 이르는 310명으로 급증했다. 1901년의 개혁 이후 첫 20년간 재림교회는 신임 선교사 2,257명을 파송했다. 그 결과로 선교가 세계적으로 확장되었다. 1920년에 북아메리카의 교인은 전체의 51.7퍼센트를 차지했고 나머지 지역이 48.3퍼센트였다. 1921년에는 이 비율이 49.83퍼센트와 50.17퍼센트가 되었다. 이렇게 1921년은 북아메리카 이외 지역의 교인 수가 북미 대륙의 교인 수를 마침내 넘어서는 해가 되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것은 선교사의 수와 그 시대의 선교사들이 최일선에서 직접 행한 사역에 크게 기인한다.

이후 신임 선교사 수가 다시 300명에 이른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지나서이지만 1920년대에도 신임 선교사 수는 매년 150명을 넘었다. 대공황으로 선교사의 수는 3년 동안 연 100명을 밑돌 정도로 급격히 줄었다. 그러나 1930년대의 나머지 기간에는 교회가 직면한 심각한 재정 긴축에도 불구하고 신임 선교사 100여 명이 매년 파송됐다. 이 수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함께 다시 떨어졌다. 그러나 전쟁의 가장 힘든 순간에 대총회장 J. 라마 매컬해니와 총무 어니스트 D. 딕의 매우 대담하고 비전 넘치는 계획으로 그 수치는 전쟁이 마치기도 전에 상승했다. 대공황의 시작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의 15년간에도 임명받은 신임 선교사 1,597명이 있었다는 점이 놀랍다. 

전쟁 이후의 4반세기인 1946~70년은 재림교회 해외 선교 프로그램의 황금기였다. 이 25년 동안 ‘선교지 파송 사역자’(이것은 교회의 공식 용어이다.)의 수는 총 7,385명이다. 


[디자이너 - 도표 삽입]


1969~70년에 신임 선교사의 수는 총 970명으로 교회 역사상 그 어떤 2년 동안 파송된 신임 선교사의 최대 수보다도 훨씬 많았다. 그러나 도표에서 볼 수 있듯 1969~70년이 선교 사업의 최절정기를 구가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70년은 선교사 수가 가장 꾸준하게 늘어갔던 4반세기의 마지막 해이기 때문이다. 1945~47년에 해외 선교사 수가 급격히 늘었는데 그 이유는 세계의 여행 여건이 개선되길 기다렸던 많은 선교사를 의도적으로 한꺼번에 파송했기 때문이다. 이 수치는 1948~50년에 부분 감소했는데 이는 중국에서 교회가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1950~60년대에는 고점과 저점을 오갔지만 전반적으로 상승 궤적을 그렸는데 1950년 이후의 추세가 계속 그렇다. 두 번째 도표는 연간 수치 이상을 보여 준다. 그것은 여러 방면의 추세를 포함하는데 이 시대에 추세가 꾸준히 상향되고 있음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상승과 하강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25년간 재림교회 선교의 연이은 성장은 북아메리카, 유럽, 남아프리카, 호주의 교회 행정자, 교육자, 의료 지도자 그리고 당연히 교인들의 거대하고 효과적인 협력의 결과였다. 그러나 지도력이 중요했다. 1901년의 재조직 이후 30년간의 극적인 팽창과 비슷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성장은 대총회 임직원들의 선교 헌신에 힘입은 바가 크다. 1952~66년에 대총회장을 지낸 루번 R. 피거, 그 후임 대총회장인 로버트 H. 피어슨은 고향 미국을 떠나 선교사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 1954~70년에 대총회 총무로 일한 월터 비치도 선교사로 봉사했고 1964년 연례 행정위원회에서 “우리는 단순히 온 세상에 선교사가 있는 교회가 아니라 세계에 선교하는 교회”라는 인상 깊은 말을 남겼다.

여기서 473명과 470명으로 우리 역사에서 선교사 파송에 각각 최고점과 그다음 최고점을 찍었던 1969년과 1970년으로 돌아가 보자. 이 두 해가 절정이었다. 그때 이후로 질적으로는 몰라도 양적으로는 내림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요컨대 1901년 재조직 이후 120년간을 살펴보면 신임 선교사의 수는 대공황 기간과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만 잠시 멈추었다가 확고하게 성장했다. 현저한 성장이 이어지다가 1960년대 말에 정체를 이루었다. 그 지점 이후로 장기 선교사의 수는 꾸준히 쉬지 않고 줄어들었다. 

이런 현상은 교인 수가 성장함에 따라 일어났다. 세계 교인 수가 늘어나면서 재림교회가 세계 선교에 헌신한 자원과 장기 선교사의 수는 더 가파르고 길게 줄어들었다. 게다가 선교사들의 사역 성격도 변했다. 그들은 과거처럼 장기간 활동하지 않는다. 


현지인들과 함께 거주하며 했던 사역

여기에 선교사들과 그들의 사업에 대한 몇 가지 사례가 있다. 

■ 조지 D. 키오와 그의 아내 매리 앤은 영국에서부터 중동까지 각기 세 곳에서 선교사로 일했다. 1908년에 영국에서 시작한 그들의 사역은 총 33년에 이르며 대총회에서 보낸 4년을 포함하면 도합 37년 동안 선교 사업을 했다. 다른 이들은 은퇴할 나이인 65세 때 조지는 아내와 함께 세 번째 선교 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조지가 72세가 되었을 때야 생의 말년을 보내기 위해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 조지와 로라 어펠 부부는 1920년에 극동 지역에 가서 선교사로 38년을 보냈다. 중국과 극동의 어느 곳에서 30년, 중동에서 8년을 보냈다. 

■ 딕과 조 하이든 부부도 선교사로 38년을 보냈다. 1930년에 사역을 시작해 페루, 볼리비아, 에콰도르의 산악 지방과 정글에서 일했다.          

■ 메릿과 윌마 워런 부부는 중국과 필리핀에서 47년 사역했다. 1913년에 시작해서 메릿이 69세, 윌마가 72세가 되어서야 그들은 고국인 미국(더 이상 고향처럼 여겨지지 않을 것이 분명한 곳)으로 돌아왔다.

■ 에즈라와 이네즈 롱웨이 부부는 38년을 선교사로 보냈는데 1918년에서 사역을 시작해서 중국지회에서 30년, 원동지회에서 25년을 보냈다. 

■ 키오, 어펠, 워런, 롱웨이은 모두 연합회장으로 직임을 다했고 어펠은 중동지회장, 롱웨이와 키오는 지회 부장도 역임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 처음에는 일선 선교지에서 일했다. 예를 들어 조지 키오와 그의 가족은 자신들의 첫 21년 대부분을 이집트 오지의 깊은 곳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조지는 지역 주민 집 흙바닥에 앉아서 그들이 주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으며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했다.2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의 선교사들은 기관이나 행정 본부에서 일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능숙한 의료인, 회계인, IT 직종을 가진 사람들이 세계 교회에서 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또한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부름을 받아 세계 곳곳으로 나가서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분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여전히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선교 재정비’ 프로젝트를 제안하는 대총회 임원진 인식이다.


1 본 기사는 다음의 글에 크게 의존했다. A. L. Chism, D. J. B. Trim, and M. F. Younker, “We aim at nothing less than the whole world”: The Seventh-day Adventist Church’s Missionary Enterprise and the General Conference Secretariat, 1863~2019(Silver Spring, MD: Office of Archives, Statistics, and Research, 2021), available from Amazon

2 참고 D. J. B. Trim, ‘“The power of real Christianity”: George and Mary-Ann Keough’s ministry’, Adventist World, 17:1 (Jan. 2021), 24~25


데이비드 J. B. 트림  대총회 자료·통계연구소장이다.



발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25년간 재림교회 선교의 연이은 성장은 북아메리카, 유럽, 남아프리카, 호주의 교회 행정자, 교육자, 의료 지도자 그리고 당연히 교인들의 거대하고 효과적인 협력의 결과였다. 그러나 지도력이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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