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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의 신적 작인(作因)과 인적 작인 믿음이란 무엇인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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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사미디어 등록일 202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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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티스 크리스투(πίστιςΧριστοῦ)’ 논쟁은 지난 40여 년간 학계에서 활발한 관심을 받는 주제이다. 이 구절은 바울 서신 중에서 비교적 적은 7번만 등장한다(롬 3:22, 26; 갈 2:16; 2:20, 3:22; 빌 3:9; 참조, 엡 3:12). 하지만 이 구절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왜냐하면 ‘피스티스 크리스투’ 즉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달되어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방편으로서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되는 데 전통적 해석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faith in Christ, 목적격 읽기)과 점차 많은 지지를 얻고 있는 ‘그리스도의 신실함’(Christ’s faithfulness, 주격 읽기)이 그것이다. 특별히 1983년 헤이스(Richard B. Hays)가 갈라디아서 본문 연구를 통해 ‘피스티스 크리스투’를 주격 읽기로 제시한 이후 이 논쟁은 신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이 구절이 ‘인간의 믿음’을 나타내는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나타내는지 결정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믿는다.’라고 말할 때 그 믿음의 기원과 그 행위의 의미에 대해서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과연 어떤 이해가 더 성경적일까? 그리고 그 해석은 믿음에 대하여 어떤 새로운 이해를 우리에게 던져 줄지 함께 알아보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vs ‘그리스도의 신실함’

바울은 로마서 1장~3장 20절까지는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가 아무도 없음을 주장하며 우리가 모두 다 죄 아래에 있음을 한탄한다. 그러나 3장 21절에서 드라마틱한 반전이 일어나는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율법 외에 한 의를 나타내심을 선언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피스티스 크리스투)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개정).


이 놀라운 선언을 포함하는 로마서 3장 21~26절의 직역을 작인(作因, agency)에 따라 <표1>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다.


3장 초반부에서 인적 작인은 전혀 의로운 일을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로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인류를 향해 왼쪽 열은 공통적으로 신적 작인(하나님)이 의로움을 나타내려 하며 의롭다 하려 하신다. 그 의로움이 계시되고 전달되는 통로이자 수단이 바로 가운데 열의 전치사구(…로 말미암아[διά…])를 사용하여 제시되었다. 그중에서 첫 번째로 언급된 표현이 바로 ‘피스티스 크리스투’ 구문(22절)이다. 이 ‘피스티스 크리스투’는 과연 인간의 믿음일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신실함일까?



‘피스티스 크리스투’는 인간 행위에 기인하지 않은 신적 전달책

작인을 중심으로 분석해 본 <표1>에 따르면 ‘피스티스 크리스투’ 구문은 주격 읽기, 즉 ‘인간의 믿음’이 아닌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말하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보인다. 첫째로 ‘피스티스 크리스투’는 의로움의 전달 수단으로써, 의로움은 신적 작인에서부터 기인하여 인적 작인으로 옮겨가는 방향성을 띤다. 따라서 이 전달 수단은 인간의 행위에 기인하지 않은 신적 전달책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의로움의 전달 수단은 땅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기인한 것이다. 


둘째로 22절의 ‘피스티스 크리스투’ 구문을 포함한 24, 25a, 25b절의 모든 구문(‘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 ‘그의 피 안에서 믿음/신실함을 통한 화목 제물’,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은 전치사 διά를 사용하여 병렬적으로 연결되어 모두 다 분명히 예수의 속죄 사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22절의 ‘피스티스 크리스투’ 구문만 그리스도를 향한 인간의 믿음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어야 하므로 ‘인간의 믿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해석함이 적절하다.


셋째로 문맥상 21절 직전까지 인간의 모습과 행위는 너무도 타락하여 의로움의 전달 수단으로 22절에 갑작스럽게 등장하기 어렵다. 따라서 신적 행위가 우선되지 않으면 어떠한 인간의 어떠한 선한 행위도 기대하기 어렵기에 22절의 ‘피스티스 크리스투’는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보아야 한다. 21절 이전에는 인간에게서 아무런 선한 행위를 발견할 수 없었다. 모두가 죄 아래 있고 의롭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 22절에서 인간에게 터치다운 하자마자 처음으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 “믿는 자”로서 서게 된다. 다른 말로 신적 작인의 신실하심이 먼저 있기에 인적 작인은 믿음을 행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26절에서 다시 한번 그의 논증을 요약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우리를 의롭다고 하려 하신다. 그 의롭다고 함을 받는 대상을 26절에서는 <‘피스티스 예수’로부터 말미암은(ἐκ) 자들>이라 소개한다.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부터 말미암아 나온 자들이 의롭다고 함을 받는 것이다. 즉 가운데 열의 예수님의 역할과 오른쪽 열의 인적 작인이 구조적으로, 또는 실제적으로 융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 안에서 인간이 신적 속성을 공유하면서 그 속에서 믿음이 탄생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와 빌립보서의 예

이와 같은 로마서 3장 22, 26절의 ‘피스티스 크리스투’ 구문의 공식은 갈라디아서 2장 16절과 20절, 3장 22절, 빌립보서 3장 9절에 나오는 ‘피스티스 크리스투’ 구문과도 아름답게 대응하고 있다. 이 용례들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1) ‘피스티스 크리스투’는 전치사 구를 이루어 신적 의로운 행위의 전달 수단으로 제시된다. (2) 문맥상 전의 바울의 비관적인 인간 묘사는 의의 전달 수단으로서 인적 작인의 기여를 효과적으로 부정한다. (3) ‘피스티스 크리스투’ 구문은 항상 인간의 긍정적 믿음의 행위보다 선행한다. (4) 신적 신실함과 인간의 믿음이 융합되는 표현의 등장으로 신과 인간의 행위자 사이의 믿음이라는 행위 속에 긴밀한 관계를 추론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피스티스 크리스투’ 구문의 새로운 이해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믿는 자에게”(22절 후반부)는 로마서 3장 21~26절의 맥락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묘사된 인간 행위이다. 분명히 이전의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었으며 의롭다 함을 얻을 자들이 없었으나 ‘그리스도의 신실함’이 인간에게 임하자 인간은 믿음의 행위로서 반응하고 화답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신실함이 신자의 믿음을 끌어내는 것 같은 모습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의 신실함을 경험함으로 부모에 대한 신뢰를 키우듯이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듣고 목도하고 경험함으로 ‘믿음’이 자라나며 믿음을 실질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기에 우리가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한다. 그분은 평강의 하나님이기에 우리가 평강을 누린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여러 선한 일을 행하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경우에는 믿음은 온전히 우리만의 결심과 소유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정말로 우리 가운데서 솟아난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의 신실하심을 경험하고 그분의 신실하심에 연합하여 믿음을 행하는 것이다. 


믿음은 선물이다

‘인간 믿음’은 단순하게 우리의 결심이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함’에 기인하며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개념은 바울 서신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로마서 10장 17절은 구원의 연쇄적인 구조에 대해 말하면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 믿음의 근원은 결국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 9절은 여러 성령의 은사를 나열하며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주신다고 설명한다. 이 특별한 ‘믿음’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인 것이다. 또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보다 일반적인 신자들이 경험하는 성령의 열매를 열거하며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πίστις, 피스티스)과 온유와 절제니”라고 말하는데, “충성”으로 번역된 ‘피스티스’(믿음) 또한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5:18)대로 맺히는 열매로서 신적 근원을 지닌 산물로 소개된다.


우리는 이 ‘믿음’이라는 사람의 행위 안에서 하나님의 역할과 인간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바울은 당연히 인간이 믿음을 행하는 주체이며 믿음을 행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역설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신실함’에서 기인했으며 그분의 신실함을 닮아 그분의 신실함과 연합하여 믿음을 행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마도 마가복음 9장 24절에 등장하는 어느 아픈 아이를 둔 아버지의 애절한 외침이 이 믿음의 본질에 대한 결론을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 9:24). 


이 작인의 문제를 많은 사람은 신과 인간 사이의 경쟁적인 영토 싸움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신의 역할이 커지면 인간의 역할이 작아지고 인간의 역할이 커지면 신의 역할이 작아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바울의 조언은 두 작인 사이에 국경을 그리지 않는다. 대신 신적 작인은 인적 작인이 그 의로운 행위를 해 낼 수 있도록 그분의 능력과 성취를 제공한다. 그때 두 작인은 온전히 하나로 연합하고 일치된다. 두 나라가 파이를 경쟁적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의 나라에 인간의 나라가 여전한 자유 의지를 가지고 온전히 속하는 것이다. 그 신적 도움 속에서 인간은 의로운 행위를 하며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바울은 진심으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고백한다.



- 허상민 삼육대학교 신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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