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인형도 사랑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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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 하면 우리는 월트 디즈니(Walt Disney)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사랑스러운 나무 인형 피노키오를 자연스레 떠올린다. 자꾸 거짓말을 해서 코가 길어져도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한 그 피노키오 말이다.
하지만 카를로 콜로디(Carlo Collodi)라는 필명을 가진 이탈리아 작가의 원작 『피노키오의 모험: 꼭두각시의 이야기』(Le avventure di Pinocchio: Storia di un burattino, 1881~1883)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전혀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원작에서의 피노키오는 그저 애교스러운 장난꾸러기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집에서 도망쳐 밥 먹듯이 말썽만 피우며 제페토의 속을 썩이던 피노키오는 결국 길에서 강도를 만나 나무에 목이 매달려 죽음을 당하면서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피노키오』의 이런 끔찍한 결말은 독자들로부터 강한 비판과 항의를 받게 되고, 이후 콜로디는 결말을 바꾸기도 한다.
원작 『피노키오』의 교훈은 아주 명확하다. 콜로디는 『피노키오』에 등장하는 귀뚜라미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부모님 말씀을 듣지 않고 집에서 뛰쳐나가는 애들은 문제아야. 그 애들은 결코 행복해지지 못할 거야.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는 땅을 치며 후회하겠지.” 이처럼 『피노키오』는 ‘후회’라는 감정을 이용해 아이들을 훈육할 목적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월트 디즈니의 20세기 《피노키오》(Pinocchio, 1940)
콜로디의 ‘피노키오’라는 캐릭터를 눈여겨본 월트 디즈니는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원작 『피노키오』의 무시무시한 결말을 삭제한다. 그리고 ‘문제아’ 피노키오는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변모시키고,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아름답게’ 덧칠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랑스러운’ 피노키오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이렇게 탄생했다.
자녀가 없는 목수 제페토는 꼭두각시 인형을 만들어 ‘피노키오’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그러고는 잠자리에 들기 전 별을 향해 소원을 빈다. 나무 인형 피노키오를 ‘진짜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말이다. 그 소원을 들은 파란 요정이 나타나 피노키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피노키오는 여전히 나무 인형의 모습이다. 요정은 피노키오에게 “네 자신이 용감하고, 진실되고, 이기적이지 않다는 걸 증명하면 언젠가 ‘진짜 소년’이 될 거야.”라고 일러 준다. 결국 피노키오는 고래에게 잡아먹힌 제페토를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 내어 ‘진짜 사람’으로 거듭나면서 동화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피노키오』 원작과는 달리 ‘아름다운’ 월트 디즈니판 《피노키오》에도 여전히 한계점은 존재한다. 그것은 ‘나무 인형’ 피노키오가 반드시 ‘진짜 사람’이 되어야만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피노키오는 ‘나무 인형’으로서는 결코 사랑받을 수 없는 걸까? 반드시 ‘진짜 사람’이 되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는 걸까? ‘진짜 사람’이 되어야만 ‘해피엔딩’인 걸까? 피노키오는 나무 인형으로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수용되고 인정받을 수 없는 걸까?
이러한 질문은 동화를 읽는 아이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특히 자기 스스로를 ‘평균’, ‘보편’, ‘일반’과 ‘다르다’고 느끼는 아이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아이들은 《피노키오》를 보면서 ‘내가 반드시 그 무엇(somebody)이 되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는 걸까?’, ‘현재 나의 모습으로는 결코 사랑받을 수 없는 걸까?’라는 슬픈 생각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는 결코 사랑받을 수 없다는 월트 디즈니판 《피노키오》에 함의된 메시지는 『피노키오』 원작의 무시무시한 결말보다 더 끔찍할 수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의 21세기 《피노키오》(Pinocchio, 2022)
이러한 맥락에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21세기 《피노키오》는 기존의 피노키오 버전들과는 사뭇 다른 획기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델 토로의 《피노키오》에서 목수 제페토는 전쟁 중 포격으로 아들 카를로를 잃는다. 실의에 빠진 제페토는 어느 날 홧김에 나무를 깎아 피노키오를 만들어 아들로 삼는다. 그러나 제페토는 피노키오를 자신의 ‘진짜 아들’로 생각하지 않는다. 제페토에게 피노키오는 어디까지나 죽은 아들의 ‘대체물’일 뿐이다. 제페토는 ‘있는 그대로’의 피노키오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고, 왜 “카를로처럼 굴지 않느냐”고 피노키오를 비난한다. 그런데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누군가의 ‘대체물’이라는 사실만큼 슬픈 일이 또 있을까?
델 토로의 《피노키오》에서 어른들은 피노키오를 자신들에게 필요한 존재로 훈육시키고 성장시키고자 혈안이 되어 있다. 제페토가 피노키오에게서 카를로의 모습을 기대하듯 볼페 백작은 피노키오를 ‘살아 있는 꼭두각시’로 이용해 큰돈을 벌 궁리만 하고, 포데스타 시장은 피노키오를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의 승리를 이끌 ‘전사(戰士)’로 만들고자 한다. 아무도 피노키오에게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는 묻지 않는다. 아무도 피노키오에게 지금 이대로의 모습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말해 주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페토와 볼페 백작이 피노키오를 서로 ‘자신의 것’이라고 다투다가 피노키오가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차에 치어 산산조각이 나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이처럼 어른들이 아이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착각한다면 아이들은 피노키오처럼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델 토로의 《피노키오》는 원작이나 월트 디즈니판처럼 아이들에게 협박성 교훈이나 훈육적 메시지를 남기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어른들에게 강력한 성찰적 메시지를 던진다. ‘후회’하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 때문에 산산조각이 나 버린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이 될 터다. 델 토로의 《피노키오》의 결말부에서 제페토가 ‘나무 인형’ 피노키오를 끌어안고 하는 말은 어른의 입장에서, 부모의 입장에서 꼭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피노키오, 내 아들아, 내가 널 다른 아이로 만들려고 했구나. 이제 카를로가 되지도, 다른 누군가가 되지도 마라. 네 모습 그대로 살아라. 난…난 널 사랑한단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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