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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은 매일이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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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사미디어 등록일 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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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이 없다면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매일같이 우리는 전철을 타고 어디론가 향한다. 30년 전, 독일로 이주했을 때 우리 가족도 그랬다. 우리는 전철역 가까이에 살았고 기숙사 G동 앞을 시내 전철이 오갔다. 작은 베란다에 서서 전철이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우리 아들의 눈은 언제나 반짝였다. 매일 오가는 전철이었지만 아들은 한번도 그 광경을 지루해하지 않았다. 마치 매 순간이 처음인 것처럼 모든 것이 새롭고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때부터 전철은 아들의 특별한 일상이 되었다.


나는 그 시절 마인츠(Mainz)대학교에서 어학 과정을 듣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남편과 번갈아 가며 아이를 돌보았는데 남편이 오전에 아이를 돌보고 나서 환승역까지 데려다주면 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공부와 육아를 함께하려는 욕심에 우리 아이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철을 타야 했다. 마치 어른처럼 말이다. 아들과 전철의 인연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들의 전철 사랑은 아마도 슈발바흐(Schwal bach)에서의 산책에서 비롯된 것 같다. 우리가 대학교 기숙사로 이사 오기 전에 살던 집은 들판 한가운데 있었다. 그 들판을 가로지르는 다리 아래로는 수도권 전철인 ‘슈타트슈넬반(S-Bahn)’이 지나갔다. 어느 일요일 오후, 아들과 나는 그 다리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전철이 달려왔고, 아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전철의 앞 유리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날 이후로 아이는 산책할 때마다 전철이 올 시간을 기다리며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매번 전철이 다가올 때마다 아이의 눈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아들과 나는 들판을 걷다가 조깅을 하고 있던 남편을 만났고, 우리는 함께 산책을 마친 후 다시 다리 위로 올라갔다. 신기하게도 전철과 우리의 산책 시간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우리는 다리 위에 앉아 전철이 오기를 기다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 손짓은 단순한 인사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우리 가족의 추억과 감정이 깃든 특별한 순간이었다. 남편은 어린 시절 기차를 타고 외가로 심부름을 가던 추억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리움 가득한 그 기억 속에는 어머니가 싸 주신 도시락을 들고 바닷가로 가던 순간들이 있었다. 나는 대학 시절, 정문을 지나 다리 위를 걸으며 기차 소리를 들었던 낭만적인 시간을 떠올렸다. 비록 각자의 추억은 달랐지만 우리는 전철을 향해 손을 흔들며 하나의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때 가끔 기관사도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답해 주었고, 경적을 울리며 인사를 나눌 때도 있었다. 자연스레 아들은 낡은 자동차보다 전철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전철은 아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한국에서 손님이 오셨고, 나는 수박 한 통을 들고 교회로 향했다. 수박의 무게에 발걸음은 느려졌고, 아들은 나보다 앞서 전철역으로 갔다. 건널목을 막 건너려는 순간 전철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서둘러 뛰었지만 늦었다. 아이는 이미 전철에 올라탔고, 내가 보는 앞에서 전철 문이 빠르게 닫혔다. 나는 멍하니 닫힌 문 너머로 전철에 타고 있는 아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아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고 나도 공포에 휩싸였다. 세상이 멈춘 듯한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침착하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다음 역에서 내려!” 아들은 내 입 모양을 집중해서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전철은 곧 출발했고 나는 가슴이 쿵쾅거리는 걸 느끼며 초조하게 다음 전철을 기다렸다. 마음속에서는 계속해서 간절한 기도가 흘러나왔다. “제발, 제발 우리 아들이 무사히 다음 역에서 내리게 해 주세요.”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전철이 도착했고, 나는 서둘러 다음 역에 내렸다. 그곳에는 두려움을 이겨 내고 차분히 서 있는 아들이 있었다. 나는 아이를 끌어안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우리는 조금 늦게 예배에 참석했지만 그 순간의 소중함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셨다는 사실이 나를 감싸안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도 나는 오랫동안 그 기억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두려움과 후회가 그날의 기억을 마음 깊이 묻어 두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날, 교회에서 감사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에 나는 그날의 일을 교우들과 나누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모두가 입을 모아 “정말 큰일 날 뻔했네요!”라며 놀랐고, 그제야 나도 그때 상황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아들이 내 입 모양을 보고 그 뜻을 알아차렸기에 우리는 무사히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만약 그때 아이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면, 만약 내가 독일어로 그 말을 전달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아이는 전철을 타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 버렸을지도 모른다.


감사한 마음이 가득해진 나는 아들에게 물었다. “그때 기억나니?”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전철 안에서 무서워 울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나를 달래 주고 어떤 아저씨는 전철을 멈추라고 소리쳤던 게 기억나요.” 나는 다시 물었다. “어떻게 다음 역에서 내릴 수 있었어?” 아들은 내 입 모양을 보고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다음 역에서 내려.”라고 말해 주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주변의 모든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셨음을.


“만약 그때 엄마를 못 만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내가 다시 묻자 아들은 의외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아마도 독일 가정에 입양돼서 독일에서 살고 있었겠죠.” 우리는 그 ‘만약’에 대해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날 전철 안에서 나를 대신해 아이를 돌보아 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무사히 전철에서 내리게 해 주셨다. 그 절박한 순간에 드린 짧고도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은 분명히 들어주셨다.


세월이 흘러 이제 청년이 된 아들은 다시 독일로 돌아가 전철을 타고 프랑크푸르트의 교회로 향한다. 이제는 엄마의 손을 잡지 않아도 혼자서 전철을 탄다. 어느 아침, 아들은 교회로 가는 길에 나에게 카톡을 보냈다. “예매한 전철이 갑자기 없어졌대요. 그래서 다른 전철을 타러 가는 중이에요.” 조금 후, 또 다른 메시지가 왔다. “전철로 뛰어가다가 넘어졌어요. 무릎을 다치고 휴대폰 액정이 깨졌어요.” 나는 그 늦은 밤에 답장을 보냈다. “엄마를 잃어버리지 않고 무사히 자라서 교회 다녀온 것에 비할 수 있겠니? 정말 수고했어.”


어릴 적부터 전철을 사랑했던 아들은 이제 그 전철을 타고 교회로 그리고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다. 매일의 일상이 우리에게 기적임을 그날의 기억을 통해 깨닫는다. 



​조수정 이화여대 화학과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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