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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 재림 전 심판, 예언의 신에 관한 질문과 답변

18. 히브리서 6:19의 “휘장”은 지성소의 휘장만을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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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의 주석자들은 히브리서 6:19(같은 책의 다른 곳의 용례를 포함하여)의 카타페타스마라는 용어에 대한 그들의 해석의 기초를 이루는 네 가지 가정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한다. (1) 히브리서 6:19의 “휘장 안에”(에이스 토 에소테론 투 카타페타스마토스)라는 구절에 들어 있는 “휘장”(투 카타페타스마토스)은 성막의 둘째 휘장, 곧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는 휘장을 말한다. (2) 같은 구절에서 토 에소테론(“안에 있는 [곳]”)은 안쪽 전(殿) 곧 지성소를 가리킨다. (3) 구약의 성소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는 지성소에서만 볼 수 있었다. (4) 히브리서 9장의 타 하기아는 지성소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히브리서의 성소 용어와 성소 이미지는 둘째 칸과 대속죄일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추정한다. 지면 제약상 여기서 네 가지 가정 모두를 논의할 순 없고, 히브리서 6:19에 나오는 용어들인 카타페타스마와 에소테론의 의미와 관련된 처음 두 개만을 분석하려고 한다. 처음 두 개의 결론의 타당성에 문제가 제기되면 셋째와 넷째 가정도 문제가 되므로 새로운 분석이 요구될 것이다.

카타페타스마
옷토 미헬(Otto Michel)의 다음의 진술은 히브리서에 나오는 카타페타스마에 관한 주석자들의 전반적인 생각을 반영한다. “히브리서가 ‘휘장’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은 그 용어의 폭넓은 용법과 조화되게 지성소 앞에 있는 휘장을 가리킨다.”1 주석자들은 필론의 이해 및 레위기 16:2(특히 “성소의 장 안”)에 대한 <70인역>의 번역에 기초하여 이런 입장을 지지한다.2

마커스 도즈(Marcus Dods)에 의하면, 필론(De Vit. Mes. 3.5)은 칼륌마라는 용어로써 첫째 휘장을 가리키고 카타페타스마는 둘째 휘장을 가리키기 위해 남겨둠으로써 성소의 두 휘장을 구분했다. 그런 다음 도즈는 이것이 바로 신약에서 카타페타스마를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제안한다.3

그러나 B. F. 웨스트코트는 필론이 이런 용어들을 사용한 것은 “영적인 해석”을 하기 위함이었다고 지적한다.4 필론이 그의 알레고리 해석에서 칼륌마와 카타페타스마라는 두 용어를 자유롭게 확대 사용하여 이런 분명한 구분을 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의 알레고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반영하는가? 히브리서 9:3을 보고 어디서 지상 성소의 안쪽 휘장이 “둘째 휘장”(듀테론 카타페타스마)이라고 칭해졌는지 의아해 한다. 그러나 안쪽 휘장을 밝히기 위해서는 수 형용사 듀테론(“둘째”)이 꼭 필요하다면, 필론이나 도즈가 제안한 것처럼 안쪽 휘장을 가리키기 위해서 구태여 카타페타스마라는 단어를 남겨 둘 필요가 있을까?

<70인역>에서 레위기 16:2의 구절, 에이스 토 하기온 에소테론 투 카타페타스마토스(“휘장의 안쪽 성소로”)와 히브리서 6:19의 어법인 에이스 토 에소테론 투 카타페타스마토스는 매우 비슷하다. 이런 사실 때문에 제임스 모패트는 히브리서가 “레위기 16:2f의 의식에서 나온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히브리서 6:19의 휘장이 안쪽 휘장을 가리킨다고 결론지었다.5

그러나 이 두 본문의 문맥은 전혀 다르다. 레위기 16장은 청산과 심판의 날인 대속죄일을 말하고, 히브리서 6:13-20은 아브라함 언약 및 아브라함의 상속자들에게 그 약속을 나눠 주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이런데도 히브리서 6:19에 나오는 휘장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레위기 16장의 대속죄일의 문맥을 히브리서 6장에 억지로 끼워 맞춰야 하는가? 지상 성소의 대제사장이 대속죄일 의식을 집행하는 동안 안쪽[둘째] 휘장 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 히브리서 6:19의 카타페타스마를 안쪽 휘장으로 이해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가? 아니면 히브리서 6:19의 에이스 토 에소테론 투 카타페타스마토스라는 구절을 레위기 16장에 상관없이 히브리서 자체의 문맥 안에서 보아야 하는가?

필론이 성소의 안쪽 휘장(카타페타스마)과 바깥 쪽 휘장(칼륌마)을 구분하는 것에 기초하여, 웨스트코트는 “이 둘의 이런 구분이 <70인역>에는 엄밀하게 보존되어 있지는 않다.”라고 인정한다.6 웨스트코트의 견해의 문제점은 그런 구분이 <70인역>에 얼마만큼 보존되지 않았는지를 독자들에게 밝히지 못한 데 있다.

다른 주석자들은 <70인역>에 나오는 카타페타스마의 용법과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주장, 곧 이 단어를 읽을 때 둘째 휘장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 사이에 엇갈림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헤르베르트 브라운(Herbert Braun)은 히브리서 6:19에 나오는 카타페타스마토스를 해석할 때 이런 의미를 지지하면서, “대부분”(meist)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는, <70인역>에서 이 단어가 “대부분(meist)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고 말한다.7 브라운이 사용한 “대부분”이라는 말이 거의 모든 경우에 안쪽[둘째] 휘장을 가리키기 위해 다른 모든 단어를 제쳐두고 카타페타스마가 선택되었음을 의미한다면 그의 진술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의 말이 안쪽 휘장만을 가리키기 위해 카타페타스마가 사용되고 성소의 뜰이나 첫째 휘장을 가리키는 데는 거의 결코 사용된 적이 없음을 의미한다면, 그의 진술은 심각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불행하게도, 브라운이 “거의”라는 말의 의미를 밝히지 않았다.

한편, R. C. H. 렌스키(R. C. H. Lenski)는 아예 다른 여지를 남겨 두지 않는다. “카타페타스마 톤 나온은, 히브리인 독자라면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걸려 있는 안쪽 휘장을 말한다. … 그러나 바깥쪽 휘장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는 칼륌마였고, 다른 용어는 가끔 사용되었다.”8

광야의 성막이 히브리서의 성소 논의를 위한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70인역>에 나오는 카타페타스마와 칼륌마를 연구해 보면 흥미로운 점이 드러난다. <70인역> 성구 사전의 언급들을 살펴보면 놀라운 점을 보게 된다. 성소 뜰의 휘장을 가리키는 여섯 개의 언급 중에서 카타페타스마가 다섯 번 사용되었고,9 칼륌마는 한 번 사용되었다.10 성소의 첫째 휘장을 가리키는 11개의 언급 중에서 카타페타스마가 여섯 번 사용되었고,11 칼륌마 카타페타스마가 한 번,12 카타칼륌마가 두 번,13 칼륌마가 한 번,14 그리고 에피스파스트론이 한 번 사용되었다.15 둘째 휘장을 가리키는 25개의 언급 중에서 카타페타스마가 23번,16 토 카타칼륌마 투 카타페타스마토스가 한 번,17 그리고 카타칼륌마가 한 번 사용되었다.18

확실히, 카타페타스마는 거의 둘째 휘장만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25번 중에서 23번). 그렇지만 성소 뜰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6번 중에서 5번). 카타페타스마는 대부분 성소의 첫째 휘장을 가리키기 위해서도 선택되었다(11번 중에서 6번).

다시 말하면, 광야 성막의 세 가지 휘장을 가리키는 42번의 <70인역> 언급 중에서, 카타페타스마가 34번 사용되었다. 달리 표현하면, 이 42번의 언급 가운데서 8번의 경우에만 카타페타스마가 사용되지 않았다. 게다가, 두 개의 다른 경우에도 카타페타스마가 칼륌마와 결합되어 사용됨으로써, 칼륌마가 나타나지 않는 42개의 경우 가운데서 6개의 경우만 남는다.

그러므로 의심할 여지없이, 카타페타스마는 성소의 첫째 휘장뿐만 아니라, 둘째와 뜰의 휘장을 가리키는 데 구분 없이 선호되는 단어이다. 이런 <70인역>의 용례에 비추어 볼 때, 렌스키 같은 주석자들이 지지하는 가정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분명, <70인역>을 읽었던 히브리인 독자들은 카타페타스마가 이렇게 세 휘장 모두를 가리키는 데 압도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히브리서 9:3에서 수(數)형용사인 듀테론(“둘째”)을 사용하여 구체적으로 어떤 휘장을 말하는지를 밝혔다고 여겨진다.

토 에소테론
레위기 16:2에서 유추하여 히브리서 6:19의 토 에소테론이 둘째 휘장을 가리켜야 한다는 가정을 분석할 때, 히브리서에 나오는 이 구절에서 하기온이라는 말을 생략하여 레위기 16:2의 구문과 다른 구문을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주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70인역>의 레위기 16:2에 나오는 표현(에이스 토 하기온 에소테론 투 카타페타스마토스)에서, 토 하기온은 전치사 에이스의 목적어로서 명사적 용법의 형용사로 쓰였다. 사실, 에소테론이라는 전치사는 레위기 16:12, 15에서처럼 장소를 나타내는 소유격이 뒤따라오는 부적절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히브리서 6:19에 나오는 에이스 토 에소테론 투 카타페타스마토스에서는 토 에소테론은 명사화되어 있어서,19 전치사 에이스의 목적어 기능을 하고 있다. 따라서 투 카타페타스마토스라는 구절도 장소를 나타내는 소유격으로 되어 있다.

폴 일링워쓰(Paul Ellingworth)와 유진 니더(Eugene Nida)는, “전”(shrine)과 “성소”(sanctuary)라는 말은 명사적으로 쓰인 에소테론과 결부시켜 이해해야 하므로, “내전”(inner shrine, 더 안쪽의 전) 또는 “지성소”(Most Holy Place)로 보아야 한다.20 그러나 이런 이해는 카타페타스마가 둘째 휘장을 가리킨다고 볼 때만 맞다. 앞에서 우리는 카타페타스마가 세 가지 휘장을 모두 가리키는 데 전반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휘장 뒤 “안쪽”(에소테론)이 성소의 둘째 칸을 가리킬 수 있는 것처럼 첫째 칸도 가리킬 수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6장의 문맥에서 어떤 휘장을 가리키는지 직접 밝혀 주는 말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6;19에서 비교급 형태인 에소테론(“더 안쪽”)도 “더 안쪽의 전”(inner shrine)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당시 헬라어의 비교급 형태는 엄격하게 비교급의 의미로만 사용되지 않았다. 그런 사례가 레위기 16:2에도 나타나는데, 에이스 토 하기온 에소테론 투 카타페타스마토스라는 구절의 문맥을 살펴보면 토 하기온은 언약궤가 있는 방으로, 그 궤 앞에 둘째 휘장 곧 투 카타페타스마토스가 쳐있는 곳을 말한다. 여기서 에소테론은 단순히 “안에”(within)라는 의미의 전치사 에소로 이해될 수 있다. 문맥에 비추어 보면, 에소테론이라는 단어를 다른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히브리서 6:19에서도 마찬가지로, 에소테론은 “더 안쪽”(inner)이 아니라 단순히 “안에”(within)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비교급 형태로 보고 더 안쪽 휘장 뒤에 있는 칸이 무엇인지를 밝히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히브리서 6:19의 문맥
G. W. 부캐넌(G. W. Buchanan)은 다소 이해하기 힘든 다음과 같은 진술을 했다.
<70인역>에는 토 하기온 에소테론(“the Holy innermost place”, 맨 안쪽의 거룩한 곳)이라고 되어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다른 본문을 사용했든지, 아니면 이 단어[토 하기온]를 생략하기로 선택했겠지만, 문맥에 비추어 보면 이곳을 지성소로 이해해야 한다. <70인역>의 본문은 대속죄일의 아론의 행동을 언급한다. 저자가 이 본문을 인용한 이유는 앞에서 한 논의를 계속하기 위함이었다. 아브라함에게 처음 약속이 주어진 이래로 다른 세대들이 성취되기를 희망했던 것이 저자의 세대에 성취되었을 것이다.22

부캐넌은 레위기 16장의 대속죄일이 히브리서 6장의 문맥 및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히브리서 6장의 문맥에 비추어 이곳을 레위기 16장의 문맥이 명백하게 지시하는 곳, 곧 지성소로 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도 지적하지  않는다. 부캐넌은 레위기 16장의 문맥을 히브리서 6:19을 이해하는 토대로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러나 히브리서 6:19은 히브리서 자체의 문맥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휘장”이라는 용어는 그것의 특정 문맥 안에서 그 자체의 의미를 지니도록 해야 한다.

레위기 16:2에서 문맥은 카타페타스마를 “둘째 휘장”으로, 토 하기온을 “둘째 칸”으로 밝힌다. 또한 히브리서 9:3에서 전반적인 문맥과 수 형용사 듀테론(“둘째”)의 사용은 카타페타스마가 둘째 휘장임을 밝혀 준다. 그러나 레위기 16장과 히브리서 9장의 문맥이 히브리서 6장의 문맥과 같지는 않다. 히브리서 6:19에서 카타페타스마라는 용어가 나타난다는 사실만으로는, 우리가 살펴본 대로 이 말이 주로 성소의 세 가지 휘장에 사용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둘째 휘장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6:19의 문맥은 카타페타스마의 의미를 밝히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히브리서 6:13-20은 아브라함 언약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주는 축복들을 말한다. (1)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들을 이루기로 스스로 맹세하셨다(13-16절). (2)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유업으로 받을 자들에게 당신의 약속을 이루실 것임을 맹세로서 보증하셨다(17절). (3)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변개할 수 없는 사실에 큰 용기를 얻어 우리 앞에 놓인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의) 소망을 붙잡는다(18절). (4) 그 소망은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하여 앞서 가신 곳, 즉 “휘장 안으로” 들어간다(19, 20절).

이 문맥은 성소 자체 곧 그것의 칸들, 기구, 예식 등을 다루지 않고, 레위기 16:2과 히브리서 9:3의 문맥에서처럼 대속죄일도 언급하지 않는다. 히브리서 6:19에서 카타페타스마는 아브라함의 언약 및 그것에 포함된 축복의 나눠 주심에 관하여 논의하는 부분에 나온다. 여기에는 어떤 휘장을 가리키는지를 말해 주는 단서가 없고, 단순히 예수께서 봉사하시는 곳, 즉 언약의 백성의 소망이 집중되어 있는 곳, 그 언약의 축복이 흘러나오는 곳이 어디인지를 말하기 위해서 카타페타스마가 도입된다. 히브리서 전체 논의의 더 넓은 문맥에 비추어 보면, 여기서 카타페타스마는 아브라함의 언약에 포함된 축복들이 베풀어지는 성소를 은유적으로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결론
주석자들은 히브리서 6:19의 카타페타스마가 성소의 “둘째 휘장”을 가리키고 에소테론은 “더 안쪽 성소”(둘째 칸)을 가리킨다는 데 사실상 만장일치로 동의하지만, 이런 가정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로 의문시 된다. (1) <70인역>에서 카타페타스마라는 단어는 42번 가운데 34번이나 성소의 세 가지 휘장을 두루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2) 에소테론은 히브리서 6:19에서 명사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카타페타스마를 둘째 휘장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더 안쪽 성소”(inner shrine)로 번역할 수 없다. (3) 히브리서 6:19의 문맥에 비추어 여기서 카타페타스마는 레위기 16:2과 히브리서 9:3에서처럼 둘째 휘장으로 볼 수 없다. (4) 히브리서 6:19의 문맥과 히브리서 전체의 더 넓은 문맥 안에서 카타페타스마는 예수께서 우리를 앞서 들어가신 곳, 즉 우리의 소망이 있고 예수께서 아브라함 언약의 축복들을 나눠 주시는 하늘 성소를 은유적으로 가리킬 수 있다.
결론적으로, 카타페타스마와 에소테론에 관한 가정들의 타당성이 결정적으로 도전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성소 안에서의 성부 하나님의 임재와 타 하기아의 의미에 관한 학자들의 가정들 또한 의문시된다(부록 1을 참조하라).



George E. Rice

<미주>
1) Otto Michel, “Der Brief an die Hebraer,” in Kritisch-Exegetischer Kommentar uber das Neue Testament (Gottingen, 1955), 254.
2) 참조 Geroge Wesely Buchanan, The the Hebrews, AB 36 (Garden City, NY, 1985), 116; Michel, 253-54; James Moffatt,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Hebrews, ICC (Edinburgh, 1979), 89; Brooke Foss Westcott, The Epistle to the Hebrews (Grand Rapids, MI, 1970), 163.
3) Marcus Dods, “The Epistle to the Hebrews,” in 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 ed. W. Robertson Nocoll (Grand Rapids, 1970), 305.
4) Westcott, 163.
5) Moffatt, 89.
6) Westcott, 163.
7) Herbert Braun, “An die Hebraer,” in Handbuch zum Neuen Testament, 14 (Tubingen, 1984): 191. 독일어 원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In LXX unubertragen, meist fur den Vorhang zweischen dem Heiligen und dem Allerheiligsten.”     
8) R. C. H.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the Epistle to the Hebrews and of the Epistle of James (Columbus, OH, 1938), 205-6. 렌스키는 여기서 히브리서 6:19을 주석하는 데 공관복음서의 용법을 사용하고 있다(마 27:51; 막 15:38; 눅 23:45).
9) 출 37:26; 39:19; 민 3:26; 4:32; 왕상 6:36.
10) 출 27:16.
11) 출 26:37; 37:5 (36:37); 39:19 (40); 레 21:23; 민 3:10; 18:7.
12) 출 40:5.
13) 민 3:25; 4:31.
14) 민 4:25.
15) 출 26:36.
16) 출 26:31, 33 (3x), 34, 35; 27:21; 30:6; 35:12; 37:3 (36:35); 38:18 (36:36); 39:4 (38:27); 40:3, 22, 26; 레 4:6, 17; 16:2, 12, 15; 24:3; 민 4:5; 대하 3:14.
17) 출 40:21.
18) 민 3:31.
19) 참조 Braun, 191.
20) Paul Ellingworth and Eugene A. Nida, A Translator's Handbook on the Letter to the Hebrews (New York, 1983), 131.
21) A. T. 로버트슨(A. T. Robertson)은, 부사에 기초되어 있는 비교급 형용사의 원래 의미가 “크고 작음을 비교하는 것이나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대조나 이중성이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프로테로스(부사 프로에서 나옴)는 ‘더 앞으로’가 아니라 휘오테로스(“뒤로”)와 반대되는 ‘앞으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엑소테로스는 ‘더 바깥에’가 아니라 ‘바깥에’를 의미한다.”(A Grammar of the Greek New Testament, 662). 정도니 비교의 개념은 후대에 나왔다(663쪽). 레위기 16:2과 히브리서 6:19에 나오는 에소테론의 문맥은 대조를 강조하는 원래 의도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6:19에서 명사적으로 사용된 에소테론(부사 에소에 기초된)은 단순히 “밖에”라는 뜻의 엑소테로스와 반대되는 (정도나 비교의 개념이 아닌[“더 안쪽의 전”]) “안에”라는 뜻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22) Buchanan,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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