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낙농산업 요람 ‘역사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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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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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0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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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목장터에는 사일로만 쓸쓸이 남아
더구나 그간 이 캠퍼스를 거쳐간 수많은 학생들에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제공하며, 부족한 학비를 충당하게 했던 곳이기에 소식을 전해들은 많은 이들이 깊은 감회에 젖어든다.
1949년 7마리의 젖소를 들여오면서 당시 오얏봉 기슭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삼육대학 목장은 한국 낙농산업이 태동한 요람. 6.25사변의 격변 속에서도 소들을 도보와 철도를 이용해 부산까지 이동시키며 우유를 생산, 배달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서는 지금의 사일로가 서 있는 자리에 연이어 막사목장을 짓기도 했다.
서울 수복과 함께 피난에서 돌아온 젖소가 생각한 신선한 우유는 두 필의 말이 끄는 마차에 실려 서울시내 외국인 주택에 배달되어 많은 이들의 입맛을 돋우며 사랑을 받았다.
지금의 대강당, 에스라관, 도서관, 과학관 일대가 모두 대학 농장터 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지금도 많다. 1953년대의 일이다. 당시의 삼육대 농장은 제명호의 물을 파이프로 연결하여 한국에서 처음으로 스프링클러 급수영농을 실시한 국내 최초의 청정농법을 실시한 선진 농장이었다. 때문에 각계의 견학과 관광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시범농장이기도 했다.
1955년 10월에는 135평 규모의 철조골격의 함석 2층 건물을 완성하기도 했으나, 1994년 선교 90주년 기념관 건축을 위해 멸실되었다.
점차 늘어나는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실업부장이었던 하정식 교수의 주선으로 1964년부터 1977년까지 모두 200마리의 젖소를 도입, 여러 농가에 분양하고 관련 낙농기술을 보급함으로써 한국 낙농산업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청정시스템을 도입, 학생들의 근로로 최신 처리시설을 통해 생산된 삼육우유는 지금의 청와대인 경무대, 미 대사관 등 각급 공관과 미8군에 보급되어 명성을 쌓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 낙농산업과 관련 교육을 태동시키며 그 수익으로 대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삼육대 목장과 우유는 이제 그 영욕의 세월을 쓸쓸히 접으며, 역사 속으로의 퇴장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옛 목장터 한 켠에는 그 화려했던 역사의 유일한 흔적인 사일로만이 홀로 남아 추억을 곱씹으며 쓸쓸이 자리를 지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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