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류제한 박사와 메 에임스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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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김범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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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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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신 목사의 ‘한국 재림교회사’에서
그러나 1941년 조선총독부의 교회해산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본국으로 건너간 뒤, 5년 후 간호사 그레이스 레아와 재혼했다. 이듬해 다시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국을 찾은 류제한 박사는 이후 1967년 은퇴할 때까지 한국에서 의료선교사로 봉사했다. 지난 1994년 미국 워싱턴주의 일가에서 주 안에서 잠들었다. 그의 숭고했던 일생을 김재신 목사의 ‘한국 재림교회사’에서 살펴본다.
류제한(Dr. George Henry Rue: 1889-1993) 박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시에서 출생하여 재림신앙 가운데 성장하였으며, 태평양연합대학(PUC)을 1920년에 졸업하고, 의료선교를 위해 로마린다대학에 입학하였다. 익년 6월 19일 대학 시절부터 사귀어 오던 메 에임스(MAE AMES)와 결혼하였고, 1924년에 의대를 졸업하였다.
그후 2년간 로스앤젤레스 종합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거쳐 1925부터 3년간 미주에서 개업의로서 활약하다가 1928년 11월에 한국 의료선교사업에 부름을 받게 되었다.
모든 것을 준비하여 1929년 4월 10일 샌프란시스코발 일본 요코하마행 시베리아 마루호에 승선하여 일본을 경유, 한국 순안에 의료선교사로 첫 발을 내딛은 날은 1929년 5월 7일이었다. 도착하여 순안병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7월 19일에 총독부에서 정식 병원 인가를 취득하였으며, 의료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보다 폭넓은 의료선교사업의 전개를 위해서는 수도 서울에 의료기관을 설치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1931년 6월에 서울로 이사하여 장곡천정(현 소공동)에 2층집 두 칸을 새로 얻어 개원하고 회기동에도 출장소를 설치하여 1주 1-2회 왕진하였다.
1932년 11월 1일에 소공동에서 인사동으로 이전하였는데, 본래 병원으로 사용하던 6베드의 입원실도 갖춘 좋은 병원이었다. 처음엔 경성요양의원이라 하였다가, 이듬해에 경성요양병원이라고 개칭하였다.
유 박사는 서울뿐 아니라 순안병원도 돌봐야 할 처지이므로 주말에 밤차를 이용하여 양쪽을 오가며 두 병원장으로, 1936년 인노센트 의사가 순안병원장으로 부임하기까지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1933년 3월 22일 휘경동 29-1(현 병원 소재지)에 새 부지 12,000평을 12,000원에 구입하여 중국지회 설계주임 우드(Wood) 씨를 초빙하여 병원을 신축하고 1936년 초에 완공을 보아 2월 1일부터 환자를 받기 시작하였고, 2월 15일에는 성별식을 갖고 경성요양병원이라 명명하였다. 4월 중순에는 부속 간호원 양성소를 개원하고 6월 15일에 낙성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그 해 여름에 인사동에 있던 병원을 낙원동 141번지로 옮기고 경성요양병원 시내 출장소로 1937년까지 운영하였다.
그러나 병원사업이 한창 궤도에 오르고 있을 때, 사랑하는 아내 메 에임스가 주 안에서 잠들게 되었다. 장례는 교회장으로 양화대교 곁 당인리 발전소 옆에 있는 외인묘지에 안장하였다.
1937년 5월 10일 저서 ‘위생과 치료’ 158면의 소책자를 시조사에서 출간하였다. 1940년에는 미국 외과의협회에서 100명 이상 수술한 시술의에게 주는 F.A.S.S 학위를 수여받았다.
당시 시국관계로 원장직을 정사영 박사에게 위임하고 1941년 2월 16일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6년간 로스앤젤레스 교외 몬테벨로에서 다시 개업의로 지내다가 1947년 산과 간호사이던 그레이스 레아(Grace Lea)와 재혼하고, 그 해 4월 15일에 다시 내한하여 병원장으로 취임하고 5월 11일에 병원명을 서울위생병원이라 개칭하였으며, 11월에는 부속간호고등학교를 재개하여 활발히 의료사업을 재건, 추진하게 되었다.
유 박사의 투철하고 세심하며 정직하고 친절한 시술은 크게 명성을 얻어 환자는 경향각지에서 구름같이 몰려들었고, 1948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주치의로서 위촉을 받았으며, 가을부터는 미대사관 직원과 재한 외국인 건강관리의 위촉을 받게 되었다.
1948년 12월 18일에는 유제한 박사의 부인 고 메 에임스 여사의 기념 교회당을 헌당하고, 아울러 병원교회를 조직하였는데, 초대 수석장로에 선임되었다.
1950년 6월 21일 제46차 대총회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되어 한국 대표로 정동심, 박창욱, 방례두 제 씨와 함께 참석하고자 출국하였는데, 그 사이 한국엔 불행하게도 6.25 동란이 발발하게 되었다. 총회가 끝나는 때에 이승만 대통령의 “속히 나와달라”는 전보를 받고 10월에 미 대사 무초와 함께 맥아더 장군의 전용기로 귀국하여 수복 후의 서울위생병원에서 얼마간 의료시술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 후 1951년 1.4 후퇴가 있게 되었고, 모든 성도들의 피난을 위하여 동분서주하여 많은 성도들을 부산으로 안전하게 피난시키고 자신은 1월 3일 밤 10시, 맨 마지막 행렬에 끼어 한강철교를 간신히 건너 밤새 달려 부산에 도착했다.
이 때 전세가 점점 악화되자 유 박사는 맥아더 사령부에 요청하여 L.S.T 정이 배치되었고, 성도들은 제주도 성산포로 안전히 피난할 수 있었다. 1월 19일 제주도에 도착하여 진료사업을 돕다가 얼마 후 성산포초등학교에서 임시병원을 개설하여 진료하였다. 그의 부인 유은혜 여사도 피난민들과 고락을 같이하며 부산으로 건너가서 유 박사와 합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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