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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인천선교 70년’ 경인선을 탄 재림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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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 김범태 기자 [email protected] 입력 2017.09.2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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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전도자 이덕필이 뿌린 복음의 씨앗, 이제는 24개 교회로
이덕필에게 처음으로 재림기별을 받은 김태원은 자택을 성경공부와 예배장소로 기꺼이 헌신하면서 인천교회의 기틀을 놓았다. 사진은 인천의 첫 번째 교회.
대한민국의 개화기를 수놓았던 신문물은 대부분 개항한 인천으로 들어와 서울로 통했다. 인천에 처음으로 우체국, 호텔, 공원, 공장, 박물관, 극장 등이 서고 전화와 철도도 서울로 이어졌다. 특별히 감리교(1885, 내리), 천주교(1887, 답동), 성공회(내동)도 인천에 그 터를 잡고 시작했다.

1863년 미국에서 교단으로 결성한 재림교회가 태평양을 건너기까지는 40여년 정도 걸렸지만,  1904년 이북으로 상륙한 재림기별이 삽시간에 각지로 퍼지기 시작하면서 그 축을 서울로 옮기기까지는 불과 5년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재림기별이 경인선을 타고 불과 31Km 거리의 인천까지 당도하는데 무려 43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은 참으로 그 원인이 궁금한 사안이다.

재림교회와 무관했던 땅 인천, 나아가 경인지역에 서광이 든 것은 이덕필이라는 인물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 이덕필은 서울 청파동 신광학원 공동설립 이사이자 신실한 감리교인이기도 했다.

그는 아현동교회에서 열린 전도회에 참석하여 재림신앙으로 개혁한 후, 안정된 생활기반을 모두 포기하고 문서전도를 시작하며 전적으로 선교에 매진하게 된다. 그가 깨달은 재림신앙을 들고 처음으로 찾아 나선 곳이 당시 형제들이 살던 인천이었다.

그가 인천 율목동 이홍점, 김태원 등에게 처음으로 재림신앙을 전해주고 모이기 시작하던 해가 바로 1947년이었다. 그는 이후 지역을 옮겨가며 복음사역에 임하다가 10년 후인 1957년도 인천교회(현 인천중앙교회) 제6대 담임목회자로 부임하면서 초창기 인천재림교회 선교 역사에 선명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 된다.      

김태원은 해방 후 인천 배다리 근처 율목동에서 여러 명의 종업원을 두고 운영할 정도로 제법 규모가 큰 광신이발소를 경영하고 있었다. 이덕필에게 처음으로 재림기별을 받은 그는 김희명, 김상용과 함께 자택을 성경공부와 예배장소로 기꺼이 헌신하면서 인천교회의 기틀을 놓았다. 상경 후 본부교회를 섬겼고, 도미하여 4대째 장로를 배출하는 등 재림신앙의 뿌리가 깊은 가문을 이뤘다.

동란 후 1954년 4월 개교한 인천삼육국민학교(훗날 인천삼육공민학교로 인가)는 김동준, 김영관, 오세자, 문창송, 기영휘, 전대금, 서영숙 등이 교사로 활약하며 오충환 목사 등을 비롯한 수많은 인재를 양성했으나, 아쉽게 문을 닫았다. 이후 어린이선교원, 삼육영어문화원, 유치원 운영으로 교육선교의 명맥을 유지했지만, 이마저도 부족한 여건 등으로 1994년 폐원했다.

인천지역 교회는 도시 발전과 확장에 따라 교회 개척의 필요성이 절실하던 시대적 요구에 적극 부응하여 인천과 인근 부천, 김포 등지에 분교를 개척할 때마다 마음을 모은 성도들의 헌신과 교회의 협력을 통해 24개 교회로 확산 발전해 왔으며, 끈끈한 결속력을 바탕으로 서중한합회 단일지역 중 430만 인구를 품은 가장 광활하고 역동적인 지역으로 자리매김했다.
  
■ 특별기고 최정관(인천중앙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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