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특집] 재림교인의 항일의식과 민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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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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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1.02.26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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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교 100년사’로 살펴본 독립운동 참여 재림교인
재림교회는 초창기부터 정교분리의 입장에 확고히 서서 정치 불간섭주의를 견지해왔지만, 당시 조선의 재림교인들은 투철한 항일의식과 민족주의적 열정으로 독립의 열망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했다.
조선에 재림교회 복음의 기초를 놓았던 임기반 씨는 독립협회 평양지회에 관여했으며, 하와이에 거류하는 한인들의 최초 정치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운동이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자 이에 적극 협력했으며, 후에는 중국으로 옮겨 독립운동 관계에 종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활동을 높이 평가해 2000년 8월 15일 국민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재림마을 뉴스센터>는 3.1절 102주년을 맞아 오만규 교수가 쓴 <한국 선교 100년사> 중 ‘일제 치하 조선 재림교인들의 항일의식과 민족운동’ 부분을 발췌해 초기 선교역사부터 민족의 운명과 발걸음을 같이 해 온 한국 재림교회 인물들의 삶을 조명한다.
■ 외국인선교사도 독립운동 관련 혐의로 고등재판 회부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감옥에 수감된 사람의 종교별 통계를 살펴보면 구세군이 10명, 성공회가 4명, 천주교가 57명이며,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도 5명이 수감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5명의 재림교인 수감자 명단에 포함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순안 의명학교 교사 전홍석 씨도 3.1만세운동 대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극렬한” 인물로서 순안 만세운동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돼 일경에 체포됐다. 경기도 용인군 마평리에 살던 재림교인 홍재설 씨도 기미년 만세사건으로 두 차례나 투옥됐다.
놀라운 건 당시 순안병원 원장이었던 노설 선교사와 병원 직원 11명이 3.1 독립운동 관련 혐의자로 3개월 동안 경찰의 취조와 재판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순안과 가까운 백암에서 일본 경찰과의 전투로 부상 당한 독립군이 순안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치료된 사실을 일경이 탐지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고등재판에 회부돼 20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그리하여 순안 의명학교와 순안병원은 비정치적인 입장을 표방하는 재림교회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운영되는 기관이었지만, 병원 책임자와 순안학교 교사가 항일혐의로 일제 사법기관의 처벌을 받은 이후로는 일제 경찰로부터 감시받을 기관으로 지목돼 그 직원들이 경찰의 미행을 당하기도 했다.
의명학교 제2회 졸업생으로 1919년 당시 순안병원장 노설 의사의 일급 조력자로 일하던 강봉호 씨도 일제 경찰로부터 항일적인 인물로 지목돼 감시를 받던 중 상해 임시정부의 도산 안창호 선생을 찾아 순안을 탈출했다. 강봉호 씨는 상해에서 안창호 선생으로부터 1919년 중반기 상해임시정부의 재정관에 위촉됐으나 정치 참여를 기피하는 재림교회 신앙 때문에 도산의 권유를 사양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의명학교 2회 졸업생 장병삼 선생도 3.1운동의 피의자로 북간도 삼도구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의명학교 동창생인 박윤선 전도사를 만나 삼명여자소학교를 설립했다. 이와 함께 안창호 선생에 따르면 상해에서 흥사단 단원으로 활동했던 최승봉 씨도 “본시 안식일교인으로서 김창세 의사의 신임하는” 사람이었다. 이 밖에 기록에는 명시돼 있지 않지만, 의명학교 교사들이나 일반 교인 가운데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이 강한 사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유영순 목사는 자신이 의명학교에 수학할 당시 김봉걸 선생이 민족주의적 애국자였다고 회고했다. 또 초기 재림교회의 지도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인 김항모 목사의 맏사위이면서 흑교교회의 목회자로서 재림교회에서 사역자로 봉사하던 김병모 씨도 독립자금 조달 혐의로 일경의 감시에 시달리다 앞서 언급한 강봉호 씨와 함께 상해로 망명 후 다시 멕시코로 갔다.
안창호 선생의 장인은 이석관 씨는 조선 초창기 4교회의 하나인 강대모루교회의 개척자이며 진남포의 우리 여학교에서 교사로 봉사했다. 안창호 선생은 재림교회 선교사업이나 신앙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지는 않았으나 아래 동서이자 이석관 장로의 둘째 사위인 김창세 씨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조선 재림교회 초창기 개척자의 한 사람인 김승원 씨의 아들로 2대째 재림교인이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순안병원과 의명학교 및 중국 상해의 재림교회 병원에서 오랫동안 봉사한 인물이다.
김창세 씨는 상해임시정부의 중심인물인 안창호 선생의 영향으로 1920년 3월 11일 도산이 주도하는 흥사단에 입단했고, 임시정부 산하기관인 대학적십자회가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했을 때, 교수진으로 참여했다. 1920년대 후반 상해임시정부청사의 임대료를 지원하는 등 여러 모양으로 상해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했다.
<안도산 전서>에 따르면 김창세 씨가 상해에서 활동하는 기간에는 그의 연고로 임시정부, 특히 안창호 선생을 위시한 흥사단 관계자들이 재림교회의 홍적십자병원에 자주 출입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김창세 씨의 이 같은 활동을 인정해 건국포장으로 표창했다.
당시 서북지역 출신의 재림교인 중에는 안창호 선생과의 지연 및 혈연관계로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관련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여러 해 동안 시조사 편집국장을 역임했던 유영순 목사도 열렬한 민족주의자로서 비밀리 독립운동에 관여했다. 그는 3.1운동 후 독립운동을 선동하는 격문을 시조사의 등사판으로 수백 매씩 등사해 공급하는 일을 3~4차례나 했다.
그리고 1920년 1월에는 동향 친구이면서 재림교인인 최덕성 씨를 통해 상해임시정부 내무부장 안창호 선생이 안식일교회에게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실시하라고 호소하는 명령서를 받고 동생인 유흥순과 시조사의 유진상, 김원제, 권학교 씨 등과 협력해 독립선언문 2000매를 비밀리에 인쇄했다.
그러나 이 문건을 시내의 독립운동 지도부에 전달하려고 운반하던 도중 유진상, 유진익 형제가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유영순 목사 등 다른 동지들은 탄로되지 않고, 권학규 씨만 탄로되어 유진상 씨와 권학규 씨, 유진익 씨가 각각 징역 2년 6개월과 2년과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불행히도 권학교 씨는 복역 중 옥고로 사망했다. 권학규 씨와 최덕성 씨 그리고 유진상 씨는 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표창을 받았다.
이 사건은 당시 여러 차례 신문에도 크게 보도됐지만, 시조사의 안식일교인들이 주동한 사건이라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유영순 목사의 후술에 의하면 김선문 씨가 의명학교 출신으로서 독립단에 가담했는데, 그를 경찰의 감시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유영순 목사가 자신의 집에 한 달 가까이 독립운동에 협력하는 정신으로 은닉했다.
시조사의 직원으로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활동한 지사는 또 있었는데 바로 이흑룡 씨다. 그는 만주 출신의 재림신자로서 1928년경에 시조사 권서원으로 활동했다. 윤봉길 의사의 친동생인 윤남의 씨는 “시조사 기자였던 그를 정열을 바쳐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한 신비스런 독립지사”로 기억했다.
그에 따르면 이흑룡 씨는 1928년 2월 이후부터 1930년 초까지 부정기적으로 충남 예산군 덕산의 윤봉길 의사를 찾아와 <시조> 잡지를 전했을 뿐 아니라, 만주지방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했다.
윤봉길 의사는 이흑룡 씨가 찾아올 때마다 자신보다 나이가 더 많아 30세가 조금 넘어 보이는 이 씨를 절친한 친구를 대하듯, 스승을 대하듯 하면서 평소 동생과 함께 사용하던 방에서 동생을 내치고, 이흑룡 씨와 단 둘이 밤늦도록 만주 등지에서 일어나고 있던 독립투쟁의 소식을 나누고 자신들의 계획을 논의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중국 망명을 결심하고, 신의주에서 만나 함께 국경을 넘었다. 윤남의 씨는 윤봉길 의사의 중국 망명에 이흑룡 씨가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이흑룡 씨의 그 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평남 대동군 용산면 칠골교회 출신의 최경선 씨도 쟁쟁한 독립투사였다. 그는 순안의명학교 제5회 졸업생(유영순 동기)으로서 3.1운동에 투신했으며, 대한독립청년단 공성단의 단원으로 활동했다. 상해임시정부의 애국기금 수합위원으로 국내에서 활동하다 체포돼 3년의 옥고를 치렀다.
이병훈 씨는 조선 초창기 4교회의 하나인 강대모루교회 출신으로서 의명학교 제16회 졸업생이다. 연희전문학교 1년 수학 중 광주학생사건에 연루돼 상해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중산대학에 다니던 중 김구 선생의 조선독립당에 입당했다.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이밖에 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민족주의적 재림교인과 독립운동에 종사한 재림교인이 더 있을 것이 자명하다.
그런데 위에서 소개한 분들은 모두 민족운동에 가담하기 전 재림교회 교육을 받았거나 재림신앙을 하던 사람이었던 반면에, 재림교인이 되기 이전 항일 민족운동에 종사했던 분들도 있다.
정재용 장로가 대표적 인사다. 그는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던 시각에 서울 탑골공원에 운집한 5000여 명의 학생과 군중 앞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 책임으로 그해 8월에 체포돼 평양감옥에서 2년6개월을 복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그를 표창했다. 정재용 씨는 1952년 차남인 정사영 박사의 권고로 재림교회로 개종하고, 90세로 별세할 때까지 회현동교회, 용산교회, 청량리교회 등에서 장로로 봉사했다.
1929년부터 개인적인 성서연구를 통해 안식일 기별을 깨닫고, 만주 길림성 훈춘 동불사에서 온 가족이 함께 독립적으로 안식일을 지키다 1934년 안식일교회의 소식을 듣고 김규혁 목사에게 침례를 받아 만주 조양천교회에 입교한 김정규 선생도 1919년 전후에 만주 훈춘지역의 독립운동을 관장한 공로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그는 1930년대 말 만주 연길교회에서 장로로 안수받아 교회를 섬겼으며, 1945년 해방 이후 남한으로 내려와 이문동교회에 출석하다 1960년 눈을 감았다.
송영집 집사는 평남 용강 출신으로 평양의학전문을 거쳐 평양시립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1936년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가담했다. 1939년 10월 중국 충칭에서 조선청년전지공작대에 의무요원으로 참여해 의료활동과 지하공장 활동에 전념하다 1941년 1월 조선청년전지공작대가 광복군 제5지대로 개편됨에 따라 광복군 제5지대 의무대 간호책임자로 활약했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으로 광복군이 개편될 때, 제2지대 본부요원으로 배속돼 1945년 8월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활약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송 집사는 어린 시절부터 장로교 신앙에서 살았으며, 1964년 흑석동교회 조광림 전도사의 인도로 개종해 그해 7월 11일 박창욱 목사에게 침례를 받고 흑석동교회에서 재림신앙을 계속하다 1984년 5월 14일 재림의 소망을 품고 숨을 거뒀다. 외아들 엄율호 씨는 송 집사가 재림교회로 개종할 때 서울삼육중 3학년으로 전학한 후 서울삼육고등학교 17회 졸업생으로 삼육교육을 받았다.
한국 선교 100년사(오만규 저) 제1권 723~726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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