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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최경천 교수 ‘섣부른 휴머니즘 넘어선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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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천 교수 기자 [email protected] 입력 2021.11.0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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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와 사회활동 구분하는 이원론적 사고 극복해야” 강조
최경천 교수는 “복음을 전도와 사회활동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적 사고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21일 한국연합회 구내 새힘아트홀에서 열린 사회복지법인 삼육재단 설립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는 복지선교 발전을 위한 각계의 제언이 제기됐다.

그중에서도 최경천 교수(삼육대 신학과)는 ‘섣부른 휴머니즘을 넘어선 선교’라는 제목의 연구논문을 통해 재림교회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신학적 고찰을 발표해 주목받았다.

최 교수는 이 논문에서 복음을 ‘전도’(evangelism)와 ‘사회활동(social activity)’으로 구분해 보는 이원론적 사고를 극복하고, 교회가 전인적이고 통전적인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 반드시 짚어내야 하는 신학적 주제들을 조명했다. 아래는 전문.

I. 들어가며
필자가 깊이 공감하는 시 중에 윤동주의 ‘투르게네프의 언덕’(1939)이 있다. 러시아 작가인 투르게네프의 글을 접했던 윤동주가 어느 날 그의 시 ‘거지’에서 받은 영감으로 이 시를 썼다. 윤동주는 자신의 시에서 ‘세 소년 거지’를 언급한다. 이들의 행색은 비참하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름한 입술, 너덜너덜한 남루, 찢겨진 맨발.” 이내 시인의 측은지심이 발동된다. “아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그리고 자신의 호주머니를 뒤져 본다. 시인은 주머니에서 두툼한 지갑과 시계와 손수건을 확인한다. 하지만 무턱대고 내어줄 용기가 나지 않아 손으로 만지작거리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하고 아이들을 불러본다. 그것도 친절이라고 차라리 입을 다물었으면 나았을 뻔했다. 세 아이는 피곤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 아무런 대꾸 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시인은 아무도 없는 언덕 위에서 감당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시를 마무리한다. “언덕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행동이 없는 동정은 차라리 없는 것보다 못하다. 행함 없는 믿음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것처럼!

현대 교회는 어느 때보다 부유해졌지만 행동하는 능력은 거의 상실해 버렸다. 중세 교황 인노센트 4세가 교회가 가진 부를 언급하며 더 이상 교회는 베드로가 말했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를 말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 Aquinas)가 “맞습니다 성하. 교회가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던 시대도 지나가 버렸습니다”라고 받아쳤던 형국이다. 선교 실용주의가 기세를 떨치던 ‘교회성장’2)의 시기가 벌써 끝나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자존심은 얼른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일을 서두르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팬데믹 상황에서 교회의 권위와 예배의 의무가 위태롭게 되면서 선교적 교회론이 웅변했던 ‘나가는 교회’의 운동성을 오히려 교회 안으로 돌려 놓으려는 회귀적 태도도 엿보인다.

무엇이 교회의 능력이며, 무엇이며 복음의 본질인가? 본 연구는 복음을 ‘전도’(evangelism)와 ‘사회활동(social activity)’로 구분해서 보는 이원론적 사고를 극복하고 교회가 통전적인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 반드시 짚어내야 하는 신학적 주제들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특별히 2020년 현재 세계 경제 규모 12위를 자랑하고 있는 부유한 한국의 기독교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세상의 끝’ 즉 가장 변두리에 놓여진 영혼에게까지 전하기 위해서는 전인적 복음이해를 통해 복음의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교회나 개인이 행하는 사회적 활동들은 신학적 기초가 분명할 때에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학계에서는 ‘하나님의 선교’ 신학을 기반으로 통전적 선교에 대하여 이미 꽤 오랜 시간 동안 논의되었고(특별히 로잔언약에서 복음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하였음), 또 재림교회 사명진술 자체에서도 전인적 선교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기 때문에 신학적 토대는 이미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치료와 봉사에 대한 재림교회의 이해가 전도를 위한 도구로 보는 인식을 넘어 적극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면 여러 사회활동은 ‘알량한 선심’이나 ‘섣부른 휴머니즘’에 지나지 않는 도덕적, 윤리적 문제를 낳게 된다. 복음이 내포하고 있는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균형잡힌 이해를 갖게 되면 복음에 충실한 삶 즉,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 이상의 전인적이고 총체적인 그리스도인 삶의 모습을 갖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먼저 하나님 나라 복음의 통전적 의미를 살피고, 신앙의 공적인 의미를 확인하고 나서 통전적 선교에 대한 재림교회의 관점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본 연구는 한국연합회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복지선교’를 하나의 선교적 도구로 인식하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하나님 나라 복음에 기초하여 ‘교회의 사회적 책무’를 통전적 차원에서 재확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II. 복음과 문화에 대한 이분법적 구조를 넘어선 선교
복지선교를 포함한 교회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논의를 깔끔하게 정리하게 위해서는 오래 묵은 주제를 다시 꺼내야 한다. 바로 교회와 세상 또는 복음과 문화 사이의 관계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15장에서 불거진 유대적 전통을 갖지 않은 이방인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의 문제로부터 시작되어 초기 교부인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과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를 거쳐 현대신학자들인 리차드 니버(H. Richard Niebuhr)의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와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을 관통하면서 논의된 이슈이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와 함께 오래 동안 숙고한 신학적 주제이지만 선교현장의 실천적인 방법들에 관한 질문이 나오면 다시 복음과 문화의 주제로 회귀된다. 쉽게 말하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문화적 경계를 어디까지 넘어야 하는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어떻게 세상으로 들어가야 하는지에 관해 질문하기 때문이다.

최근 코로나로 인해 어느 때보다 종말론적 관심을 갖게 된 교회는 이 땅은 일시적이고 악하며, 타락했으며 심판받아야 하는 곳이기에 구별과 거룩함만을 강조하는 분리적 입장에 편승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구분을 넘어선 대립적 태도는 일찍이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비꼬아 이야기했던 것처럼 “세상 밖으로 나가”(고전 5:10)자고 하는 방식일 뿐이다.

나는 여기서 이 논의를 길게 끌고 갈 마음이 없다. 복음은 분명하게 총체적이며, 전인적이고, 통합적이며 우주적이며, 또한 전 지구적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교회에 맡겨진 복음 사명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가르치는 것으로 전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는 개인적 구원의 문제로 축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몇 가지 핵심적인 텍스트를 확인해 보자.

첫째,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의 나라 복음에 대한 내용이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7:20-21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안에”에 해당되는 ‘엔토스(entos)’는 within(속)도 되고 among(사이)도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세워지는 동시에 사회적으로 인간 사이에 세워진다. 사회적인 존재인 인간이 교회를 통해 하나로 연합되고 관계적인 악 또는 사회적인 악이 교정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 예수님이 40일의 광야에서의 시간을 마친 후에 이사야 61장을 펼쳐서 밝히신 사명을 확인해 보면 더 분명해 진다. 예수님이 밝히신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전해진 복음이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눅 4:18-19)는 것이었다. 이사야 61장에는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이 같이 나오지만 예수님은 “은혜의 해”만 언급하셨다. 이 은혜의 해는 ‘희년’(레 25:10)으로 모든 사회적 시스템이 재부팅되는 때였다. 예수님은 말라기로부터 침례요한까지 거의 400년간 지켜지지 않고 있었던 희년이 재선포하셨다. 처음부터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병든 자와 슬픈 자를 돕고, 무너진 정의를 회복하는 총체적인 회복을 의미했다.

둘째, 복음은 하나님의 통치권과 연관되어 있다. 신약이 전하는 복음은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명제로 요약된다(롬 14:9; 10:9, 12-13; 고전 12:3; 빌 2:9-11 참고). 예수님께 붙여진 ‘퀴리오스’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창조주시며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인간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임을 의미이다. 하나님의 통치의 기별은 결코 사적인 신앙의 표현으로 축소될 수 없다. 십자가의 복음은 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설명하므로 자존감을 세워주는 심리학적 문제로 전락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개인들이 단순히 죄용서 받아 천국 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이 세상이 더 이상 사단의 소유가 아니며,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재복속되었음을 선포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나무 위에 들린 날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날이다(요 7:39; 시 57:5,11; 시 108:5 참고). 십자가는 창조주 하나님이 지구의 최고통치권자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우주적 사건’이며 ‘전 지구적 사건’이다. 백부장의 입을 통해 전해진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라는 외침은 지구가 더 이상 사단의 정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라는 고백이다. 그래서 톰 라이트(Tom Wright)의 표현처럼 십자가는 혁명이 시작된 날이다.

예수님의 부활 역시 사단이 쥐고 있던 ‘죽음의 권세’(계 20:6)를 완벽하게 박살낸 사건이다. 더 이상 사단이 상관할 바 없는 세상으로 회복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도래와 함께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마 12:28 참고). 역사적으로 오순절 성령강림과 함께 제자들은 ‘걸어다니는 하나님의 나라’(출 19:6; 계 1:6; 5:10 참고)가 되었다. 이 점에서 복음이 주는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요 8:32 참고)는 ‘죄의 권세’와 ‘사단의 권세’(행 26:18)로부터의 자유이다. 이 자유가 주는 평안은 개인적으로 사단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오는 것이며, 동시에 사회적으로 모든 배타와 차별과 소외로부터의 해방에서 오는 것이다. 복음은 이사야가 말한대로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사 52:7)라는 ‘우주적 기별’이며, 계시록의 저자가 밝힌대로 구원받은 허다한 무리가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계 19:6)라고 외치는 ‘전 인류적 기별’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마주하고 있는 이 세상의 문제들은 무엇인가? 분쟁과 전쟁, 억압과 빈곤, 질병과 사고, 양극화와 불평등, 환경파괴와 지구온난화 등의 문제는 애초에 아브라함을 불러 나라를 세우실 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고 했던 하나님 나라의 과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순결한 처녀로 비유된 교회의 사명은 단순히 구별을 통한 거룩성을 확보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지구를 하나님의 통치영역으로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모든 불의한 것들을 바로잡는 ‘의의 사명’이다. 이사야는 이것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했고(사 40:3 참고), 메시야의 등장과 함께 나타날 여호와의 영광이 만드는 재창조의 사건이라고 예언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판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사 40:4)되는 메시야 혁명이 그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퀴리오스’시며,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라는 믿음은 그분의 통치 아래에서 모든 부조리와 사악한 문제들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원리를 통해 재심의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며, 이 나라가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선언한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권 회복을 위해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보게 될 때 교회가 가진 사명은 “몇 번의 피상적 기도와 인색한 동전 몇 닢으로 선교를 지지하는 척”하는 것으로 전락될 성질이 아니다. 십자가 복음이 포괄하는 그 범위를 고려할 때 선교는 인류가 겪고 있는 악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의 문제이다. 동시에 십자가 자체의 고통과 고난이 보여주는 것처럼 전인격으로 대해야 하는 어려운 길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 또는 하나님 통치의 복음은 불의하고 타락한 세상을 만날 때 변화의 능력으로 작용한다. 그리스도인의 딛는 세상에는 비교와 경쟁의 정신이 만든 차별대우가 사라진다. 약자와 빈자가 삶의 의욕을 갖는다. 권위주의와 전체주의가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갖가지 못된 폭력들은 제지를 받고, 악법들이 개선된다. 더 이상 세상은 저주받아 멸망받을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세워져야 할 사랑받는 장소가 된다. 비록 그 완전한 성취가 재림의 때에 있을 것이지만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도래까지 전진하고 전진한다. 이것이 복음이 가진 역동성이다. 복음은 문화를 상관하고, 문화를 변혁시키며, 문화를 선도한다. 우리 주님이 보여 주셨던 용감한 간섭과 참여가 가능한 이유는 모든 곳이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가 세상에 분명하게 제시된 역사적 사건(십자가)이며, 하나님 나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삶의 현재적 의미이며(부활), 미래에 다가오는 완전하게 회복된 세계에 대한 예표(재림)가 된다.

III. 사적인 신앙을 넘어 공적인 신앙으로
교회의 사회활동의 당위성을 논하기 위해 복음의 공적 특성을 조금 더 확장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윌리엄 스트링펠로우(William Stringfellow)는 계몽주의 사상의 출현 이후 교회가 신앙을 공적인 특성을 제거하고 사적인 것으로 몰아붙이므로 복음을 철저하게 외면해 왔다고 진단하였다. 기독교가 하나님과 무관한 종교로 변질되면서 사회와 정치적 문제에 침묵하는 기독교의 전통은 그리스도인 삶의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신앙을 철저히 사적인 구원의 문제로 몰아붙인 서구 세속주의의 영향은 성서가 제시하고 있는 삶의 문제를 여유가 있을 때 행하는 ‘사치의 문제’ 그래서 결국은 ‘값싼 예의’즘으로 만들어 버린다. 다시 스트링펠로우가 지적하고 있는 신앙의 본질에 대한 질문들을 다시 숙고해야만 한다.

그들이 진실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진지하게 고백한다면 이 질문들에 답해야 한다. 이 세상의 병든 이들, 버림받은 이들, 고통받는 이들, 감옥에 갇힌 이들, 궁핍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과연 누구를 위해,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모든 사람, 모든 국가, 모든 민족이 말씀의 심판과 은총에 노출되지 않은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회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과 관련된 삶의 모든 요소, 모든 논쟁과 긴장, 갈등, 격정을 하느님이 돌보신다는 확신 없이 어떻게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예배할 수 있는가?

교회의 사회적 책무에 관한 주제는 신앙의 본질에 대한 논의와 맥을 같이 한다. 재림교회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전천년주의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사회활동을 복음의 부수적 또는 도구적 요소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가 세워지는 곳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마음이며, 세계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적이며 실제적인 재림으로 마무리될 것이며, 회복된 세계는 재림을 통해서만 완성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념에도 불구하고 재림교회는 초기부터 예수님의 삶의 모습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자비와 구제 활동에 열심이었다.

J. H. Kellogg는 구제사업에 매우 열성적이었고, 그가 교회와 이별하고 난 이후에는 도르가회를 통해 박애적 활동을 지속하였다. 재림교회는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이혼이나 학대, 에이즈, 무기사용, 환경 문제나, 여성인권 문제 등에 대하여 교회의 입장문을 제시해 왔다. 또한 호주의 신자들이 시작한 재림교회국제개발조직인 ADRA가 세워져 UN에서 인정과 지원을 받는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교회의 사회적 책무를 전도의 도구정도로 보는 경향이 남아 있다. 이러한 관점은 본질적인 문제를 만들어내는데 바로 그리스도인 삶의 불균형이다. 세계가 타락하고 혼란스러워지고 파괴되는 일을 재림의 전조로 보는 관점이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인 책무를 약화시킨다면 성경이 요청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의무는 하나의 쇼에 지나지 않게 되며,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기 위한 미끼로 둔갑하는 모순을 겪는다. 진실된 사랑과 진정한 박애는 이 세상을 무책임하게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성립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먹고 입고 돈을 벌고 집을 사고 여행하며 살아가는 삶이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는 통전적 이해가 바탕이 될 때만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이사야 58:12에는 교회의 사명이 “무너진 데를 보수”하고 “길을 수축”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권성근은 이 두 말씀을 통해 교회의 사명은 전도자의 사명과 제자의 사명으로 본다. 원어가 함축하는 의미에 기초해서 “무너진 데를 보수(gadar)”하는 일은 하나님과 이웃과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는 전도(evangelism)의 일이며, “길을 수축(schuwb)”하는 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제자의 삶으로 보았다. 두 가지 사역은 그리스도인 삶의 두 날개와 같다. 결국 전도사역과 사회복음은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전도사역은 목사에게 주어진 것이고, 사회적 활동은 평신도들이 행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주님’이라는 복음전도와 그가 다스리는 나라의 구체적인 증거들로서 ‘선한 삶’을 확장시킨다. 복음은 공적인 모든 영역에서 복음이 되어야 한다. 복음은 정치, 경제, 문화, 정부, 교육 등 사회제반 영역에 ‘의’를 세우도록 요청한다. 복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세계에 긴밀하게 연결된다. 기독교의 현재적 의미를 논했던 존 스토트는 현대적 기독교를 현대 세계와 민감하게 관련된, 역사적이고 정통적이며 성경적인 기독교라고 정의했다. 스토트의 이러한 인식은 재림교회가 가지고 있는 특수한 진리를 현대진리라고 칭했던 것과 맥이 상통한다. 우리는 안식일, 재림, 성소, 죽은 자의 상태 등의 메시지가 어떻게 현대 세계의 문제들에 대하여 답을 주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현대진리는 살아있는 메시지로 오늘의 문제들에 대하여 깊이 관여하는 방식으로 주어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생명력 잃은 문자와 유물로 취급될 뿐이다. 특별히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안에서 생겨난 경제적인 착취와 억압과 불평등의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한다면 이 세계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외침이란 공허한 소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존 스토트가 이야기 한 것처럼 복음이라는 뿌리에서는 전도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두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IV. 섣부른 휴머니즘을 넘어선 통전적 선교
마지막으로 사회적 책임에 있어서 가져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진정성과 동기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겠다. 성경은 일관되게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시 82:3-4)라고 요청한다. 인간이 이웃을 대하는 태도는 인간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다.28)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안식일에 예배하는 동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예배가 마치고 시작되는 주일 동안의 모습으로 판단된다. 아예 하나님의 심판은 신자들의 성경절 암송 능력이 아니라, 가장 작은 자들에게 대한 우리의 태도와 삶으로 결정된다(마 25:40, 45). 그러나 이 성경의 가르침은 단순히 박애주의적 태도를 이야기하는 수준이 아니다. 보편적인 인간사회에서는 자신을 “선대하는 자를 선대”(눅 6:33)하는 수준이면 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원수를 사랑하”(눅 6:34)라는 부르심이며,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는 혁명적인 기별이다.

전심이 아니면, 또 전인격적인 회심이 아니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삶은 흉내조차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박애와 구호와 사회참여는 어떤 자세여야 하겠는가? 일주일 동안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교회를 향하고, 몇 시간의 예배를 위해 교회건물을 짓는 일은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 전락시키는 행위이며, 하나님을 최고로 모욕하는 태도다. 소돔의 죄는 음식물이 넘치도록 쌓아 놓고 풍족하고 태평스럽게 살면서도 “가난하고 궁핍한”(겔 16:49) 이웃을 조금도 도와주지 않은 것이었다. 신자들의 믿음은 머리로만 아는 지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가슴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변화이며,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손의 문제다.

믿음 자체가 전인적인 것처럼, 선교도 통전적이다. 야고보서 2:14-17의 기별은 전인격적인 신앙이어야만 생명력있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14절에는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질문하다. 그리고 난 이후에 구체적으로 믿음의 삶에 대하여 설명한다. 어떤 형제가 넝마를 걸치고 반쯤 굶어죽을 지경인데 “좋은 아침이야 친구! 그리스도로 옷입고 성령으로 채워야 해”라고 말하면 이것은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거룩한 말을 하면서 행동이 없다면 이것은 분노를 일으키는 태도가 될 뿐이다.

특별히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선행과 호의는 의도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 방어벽을 더 단단히 세울 뿐임을 기억해야 한다. 진심으로 영과 혼과 몸의 웰빙을 위해 일하는 것 외에는 사람의 마음에 감동이란 일절 줄 수 없는 것이다. 동기를 순수하게 해야 한다. 종종 읽혀지는 <치료봉사> 143페이지의 내용을 선교의 방법론으로 사용하는 데에 유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오직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사람들과 접촉할 때 참 성공을 거둘 것이다. 구주께서는 사람들의 유익을 소원하는(desired) 분으로 그들과 섞이셨다(mingled). 그분은 그들에 대한 자신의 동정심을 보여 주시고(showed), 그들의 필요를 따라 봉사하셔서(ministered) 그들의 신임을 얻으셨다. 그 후에 ‘나를 따라오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다.

‘그리스도의 방법’이라는 용어 때문에 선교를 관계를 형성하고, 동정심을 보여주고, 필요를 채우고, 신뢰를 형성한 이후에 복음을 전하라는 식의 순차적 방법론으로 이해한다면, 앞선 모든 행동은 전도를 위한 방편이 된다. 다시 강조하지만 믿음이 전인적인 것처럼, 선교도 통전적인 것이다. 선교는 다가오는 세상에 지옥불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뿐 아니라, 지옥같은 세상에서 구원하는 것도 포함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행동은 그분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알려주었다.

예수님의 모본은 영적인 필요와 물질적 필요를 갈라놓는 이원론을 초월한다. 마가복음 6:32-44의 사건은 예수님의 선교가 영적 필요를 채우는 설교로 마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제자들은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36절)라고 말했다. 자신의 물질적 필요는 사람들이 각자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제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37절). 예수님의 말씀은 “나의 사명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나의 기별은 설교하는 것으로 마칠 수 없다. 이들이 겪는 배고픔과 물질적 필요를 외면할 수 없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므로 물질적 필요를 채우는 것 역시 나의 사명이다”라는 뜻이었다.

<치료봉사> 143페이지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선교방법이라는 것은 바로 앞서 기록된 전인적 회복사업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은 1900년 전에 필요했던 그리스도의 계시가 요망된다. 위대한 개혁사업이 요구된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만 육체적, 정신적, 영적 회복사업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 진술은 육체적 필요를 채우는 일은 영적인 회복 사업의 방편이나 방법이 아니라 본질임을 밝힌다. 죄라는 것이 단순히 영적인 불구만이 아니라, 육체적 연약함과 정신적 결함을 일으킨 것과 마찬가지로 구속사업 역시 몸과 정신과 영혼이 창조주의 목적에 따라 회복되는 전인적인 것이다. 그래서 엘렌 G. 화잇은 “교회는 봉사를 위해 조직되었으므로, 그 사명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라고 밝힌 것이다.

사람의 물질적 필요를 채우는 행위는 선교의 방편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복음이 의미하는 통전적인 차원에서 마음을 다해 전심으로 행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어지는 진술은 이 점을 분명히 한다. 설교하는 데 시간을 더욱 적게 쓰고, 개인적 봉사에 많은 시간을 썼을 것 같으면, 더욱 큰 결과가 나타났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구제를 받고, 병든 사람들은 간호를 받고, 슬픔과 사별을 당한 사람들을 위로를 받고, 무식한 사람들은 가르침을 받고,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권면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해야 한다. 설득력과 기도의 능력과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이 수반될 때, 이 사업은 결실이 없지 않을 것이며, 또한 없을 수도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십일조의 사용에 대한 부분을 짚어보려고 한다. 대개 십일조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사용하고, 구제사업을 위해서는 투자하지 않는 경우가 보통이다. 하지만 신명기에는 십일조의 사용범위가 레위인들의 필요를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먼저 신명기 15:11에는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고 밝힌다. 이후에 신명기 26:12에서 재원에 대하여 말한다.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와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교회는 십일조를 통해 단순히 목회자의 급료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필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투자해야 할 필요가 있다. 복음이 단순히 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것이라면 말이다.

한 가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복지선교에 대한 오해를 풀어보도록 하겠다. <교회증언> 8권 184-185에 나오는 화잇의 진술을 토대로 교회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지 복지를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이 글이 기록된 배경을 알지 못한 데서 온 오해다. 문제가 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한 백성으로서 구세군의 방법을 본받고 그것과 일치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하도록 주신 사업이 아니다. 그들을 정죄하고 그들에 대하여 가혹한 말을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 아니다. 구세군 안에는 귀중하고, 자아 희생적인 영혼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구세군 안에는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고 보다 더 큰 빛을 깨닫고 모든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 전진할 정직한 영혼들이 있다. 구세군의 일꾼들은 멸시받고 천대받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 그들의 용기를 꺾지 말라. 그들 자신의 방법과 그들 스스로의 길대로 그런 종류의 일을 하게 하라. 그러나 주께서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이 해야 할 사업을 분명히 지적하셨다. 야영 집회와 장막 집회들이 개최되어야 한다. 이 시대를 위한 진리가 선포되어야 한다. 분명한 간증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설교는 어린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해야 한다.

이 내용은 화잇이 호주에 거주하고 있는 동안 배틀크릭 위생병원의 의무과장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이다. 당시 병원으로 합회로부터 분리를 시도하고 있었고, 시카고를 중심으로 한 미국 내 빈민 사역에 집중하고 있었다. 문제는 복음의 통전적 특징을 잃어버리고, 의료기술만 의지하여 전인적인 복음을 전하는 기관이 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화잇의 강조는 분명하다. 첫째는 셋째 천사의 기별을 듣지 못한 세계의 여러 지역으로 복음이 전해지기 위해 자금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통전적으로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생병원의 의사들은 그들의 손을 붙들고 계시는 주님의 도우심을 기억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강력하게 제시되고 있다. 의료선교는 반드시 복음을 전하는 일과 함께 가야만 했지만 분리적 노선을 시도하고 있는 것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의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화잇의 입장은 한 가지로 요약되는데, 의료와 전도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의사들이 충성된 파수꾼으로 하나님을 의지한 복음의 동역자로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내려놓고, 병원을 확장시키고, 구제사역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의 문장을 확인해 보라.

위생병원은 진리, 고상하고 거룩한 진리를 위하여 그분의 증인이 되어야 했다. 나의 형제여, 주께서는 그대를 그분의 귀중한 도구로 삼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위하여 서야 할 기관,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일, 수많은 사람들의 앞길에 빛을 비추는 일을 해야 할 기관과 관련된 그대의 사업을 떠밀어 낼 하나의 일을 그대에게 결코 요구하지 않으신다.

한국에서의 복음사업이 더 확장되기 위해서는 이 권고 속에 나오는 통전적인 선교를 회복해야만 한다. 병원이나 복지기관이 단순히 수익을 내거나 필요를 돕는 일로 마친다면 화잇 여사는 보냈던 경고의 편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 단순히 전도의 방편으로 건강사업들을 추진하고, 또 복지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박애사업들은 전도와 분리되어서도 안되고, 전도의 수단이 되어서도 안 된다. 분리가 되는 순간 교회의 일이 아니며, 수단이 되는 순간 섣부른 휴머니즘으로 전락한다. 전심으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전심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나가며
오늘날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평가 앞에서 교회가 대변할 수 있는 것은 교회가 세상을 대하는 진정한 긍휼의 태도일 것이다. 존 스토트는 존 웨슬리(John Wesley)의 말을 인용해 본질적으로 ‘사회적’ 종교인 기독교를 ‘외톨이’ 종교로 바꾸어 버리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임을 강조한 적이 있다. 복음은 사람들 속에서 그 가치를 평가받는다. 디도서 2:14에는 복음이 미치는 영역이 구속과 선한 일이라고 밝힌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통전적 의미의 복음이 지상에 있는 교회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수립하는 일상의 활동들을 통해 밝혀진다. 단순히 교회 내의 활동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살고있는 마을과 공동체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활동들에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 그동안 교회가 단순히 복지기관들을 수탁받아 진행했던 사업들로 대신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 삶 자체가 일상에서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삶이어야 하고, 교회가 선한 일을 일으키는 최전방이 되어야 한다. 이분법적으로 복음전도에는 힘쓰고, 사람들의 필요를 돕는 일을 도구적으로 취급해서도 안 되고, 전도는 목회자가 하고, 봉사는 신자들이 하는 식으로 나눠져서는 안 된다. 모든 신자가 모든 곳에서 모든 시간에 하나님의 선한 형상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봉사를 본질적인 그리스도인 삶의 모습으로 인식해야만 한다.

실천적으로 교회는 얼마든지 다양한 활동들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실업자들을 위한 무료급식과 숙식제공 등과 같은 기본적인 사업도 가능할 것이고, 가정폭력상담소나 푸드뱅크 등을 설치하고, 구직안내와 복지정보안내, 노인들을 위한 복지사업,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사업, 아동들을 위한 사업 등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가지고 있는 복지 아젠다들이 교회활동의 범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때로 교회가 연합하여 사회적 기업과 같은 커뮤니티 비즈니스를 개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역교회는 교단이 이끄는 사회활동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선한 삶을 살아는 것은 물론, 개인들이 연합하여 크고 작은 일들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욥의 친구들이 보여 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분별없고 비정한 위로를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 고통 속에 있는 이웃들이 복음의 가시적인 능력을 볼 때에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안과 희락”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참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섣부른 휴머니즘을 넘어 전인격적으로 선한 사업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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