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형상 드러내겠다는 다짐 곳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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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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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9.16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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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품성 주관해 주신 하나님’ ... 고 문호철 군 생전 수기 공개
‘나의 품성을 주관해 주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의 이 글은 고인이 신학과에 입학하기까지의 과정과 자신의 삶을 인도해 오신 하나님의 섭리가 감동적으로 담겨 있다.
문 군은 이 글에서 “하나님께서 제게 그러한 어려운 경험을 통해 신학도에게 어울리는 품성을 주셨다고 생각한다”며 “만약 그러한 경험이 아니었다면 저는 소외받고 어려움 당하는 사람들의 맘을 모른 채 그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입장에 서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고백했다.
또한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기에 매일같이 하나님의 품성을 따르고 하나님의 형상을 제 안에 품을 수 있도록 기도한다”면서 “수첩에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공손하게 대하기’ ‘쉬지 않고 기도하기’ ‘죄에 타협하지 않기’ 이러한 내용을 적고 하루 종일 수첩에 적어 놓은 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자신의 일상을 전했다.
고 문호철 군의 수기 전문을 옮긴다.
나의 품성을 주관해 주신 하나님 / 10학번 문호철
우선 글을 쓰기에 앞서 나에게 ‘신학도’라는 귀한 직함을 주시고,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1992년 1월 8일 조부모님, 형제분들과 함께 신앙을 지켜 오셨던 아버지, 피아노 반주라는 귀한 은사를 받으신 어머니 사이에서 첫째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조부모님께서 손자를 간절히 바라시던 터라 저는 태어나자마자 많은 사람들의 축복과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께 드려지는 봉헌식을 받았고 부모님께서는 제가 하나님 안에서, 신앙 안에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매일같이 제가 하나님 안에서 살기를 간절히 기도하셨고, 제가 더욱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말씀과 음악으로 저를 교육 시키셨습니다.
저 역시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매 안식일마다 교회에 가는 것이 기다려졌고, 가족끼리 특창을 하는 것이 어린 마음에 매우 기뻤습니다. 교회에서도 많은 어른들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러던 중 유치원을 거쳐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가 살던 마을은 삼육식품 바로 옆이었기 때문에 교인분들이 많이 사셨습니다. 그 마을에 있던 ‘직산초등학교’ 란 곳 역시 교인 분들의 자녀들이 많이 다녔기에 그 곳의 선생님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일을 잘 해결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안식일을 지키는 학생들에게는 점심 반찬을 레위기 11장에 명시된 대로 구별해서 만들어 주었습니다.
1학년을 마치고 한창 2학년 생활을 하던 중 저는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운영하시던 피아노학원이 도시로 옮겨지게 되었고 그 이유로 저희 가족은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전학을 해야 했습니다. 제가 전학을 간 학교는 고층 건물에 학생 수가 천 명을 넘었고, 선생님 수도 80명 이었습니다. 이는 시골에서 온 저를 놀라게 만들었고, 그러면서 덜컥 ‘이렇게 큰 학교에 안식일 지키는 학생이 나 한 명 밖에 없으면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사실이 되었고, 저는 걱정 가득한 마음으로 새로운 교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걱정과는 다르게 좋으신 선생님과 착한 친구들이 저를 맞아 주어 저는 금세 적응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3학년 때까지 걱정 없이 안식일을 지키며 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4학년 때, 저는 유달리 드세 보이는 남학생들이 많이 모인 반에 배정되었습니다. 그 반의 친구들은 제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저는 그 사이에서 압박에 시달렸습니다. 저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눈초리는 제가 학교에 가는 것이 싫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제 뒤에서, 심할 때에는 제 바로 앞에서 저를 욕하는 친구들이 보기 싫어졌습니다. 4학년 때에는 토요일 수업마다 토의수업이 있었지만 제가 학교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토의가 잘 안 되고 많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친구들의 이유였습니다.
어느 날은 월요일에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한 녀석이 실내화와 게임기를 가지고 제 뒤통수를 마구 내리친 적도 있었습니다. 이보다 더 심한 일도 여러 번 겪으면서 저는 절대 남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품었습니다.
그 후 저는 저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잠긴 직산초등학교로 다시 전학을 왔습니다. 물론 그 전에 있던 곳에서 어려움을 겼었던 터라 쉽게 적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제가 안식일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그 어려움 때문에 다니던 직산초등학교에서도 쉽게 적응하지 못했기에 부모님께서는 제가 삼육학교에서 중학교 생활을 하길 바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동성학교에서 제2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많은 선생님과 친구들, 선배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제가 받은 사랑은 단지 남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저의 생각을 ‘남을 사랑하며 살아야겠다’로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그 후 서해삼육고등학교에 입학했고 많은 경험을 하면서 남을 배려하고 헌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삼육대 신학과에 진학하기로 결정하였고,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게 그러한 어려운 경험을 통해서 신학도에게 어울리는 품성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러한 경험이 아니었다면 저는 소외받고 어려움 당하는 사람들의 맘을 모른 채 그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입장에 서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신학도가 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겠지요.
그러나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기에 매일같이 하나님의 품성을 따르고 하나님의 형상을 제 안에 품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그리고 매일 할 일을 계획하는 수첩에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공손하게 대하기’ ‘쉬지 말고 기도하기’ ‘죄에 타협하지 않기’ 이러한 내용을 적고 하루 종일 수첩에 적어 놓은 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지요.
비록 지금은 잘 안 되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의지한다면 기꺼이 해 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일생을 주관하시고 함께 해 오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더욱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말과 행동, 생각까지도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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