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취재] ④라오스에 ‘사랑묘목’을 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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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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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08.0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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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나눔의사회, SMA 쿤 해외무료진료 현장에서
쿤 군병원에서 자동차로 약 3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몽족마을로 이동진료가 있는 날이다. 내과 전문의 강기훈 선생과 의대생 정진하 양, 이수정 약사, 통역 등 스태프들이 도 보건국 소속 공무원의 안내로 이동진료에 나섰다.
언뜻 가까운 거리라고 생각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첩첩산중 고산지대의 가파른 외길을 따라가야 이들의 마을에 닿을 수 있었다. 도로포장이 되어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곧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산간오지에 보금자리를 꾸미고 사는 몽족마을이 시야에 들어왔다.
몽족은 중국 한족의 주류역사 시작 이전부터 중국에 거주하던 민족. 강한 씨족단위의 유대감 속에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 현재 라오스 북부지역을 비롯해 중국, 베트남, 미얀마 등지에 흩어져 있다. 이 마을에는 26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마을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단의 주민과 관계자들이 차에서 내리는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 옆에 소총으로 무장한 이들이 서 있어 깜짝 놀랐다. 마을책임자인 이들에게는 실탄과 총이 지급된다고 한다. 산짐승으로부터 가족과 주민을 보호하고, 혹시 모를 반군과의 교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누군가 귀띔해 주었다.
임시진료소는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학교에 차려졌다. 비가 내려 질퍽해진 비탈길을 미끄러지며 약통과 장비를 들고 오르느라 진료도 시작하기 전 진땀을 뺐다.
시간이 되자 마을주민들이 여기저기에서 몰려들었다. 삽시간에 족히 100명은 되어 보임직한 사람이 좁은 교실에 모였다. 진료는 영어와 라오스어, 몽족어가 교차하는 3중 통역을 거쳐야 겨우 진행될 수 있었다.
환자들은 주로 위궤양 등 소화기 장애와 갑상선염, 폐렴 증세 등을 앓고 있었다. 주로 화전을 경작하는 등 평생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보니 근골격계 질환의 통증을 호소하는 이도 많았다. 강기훈 선생의 꼼꼼하고 친절한 진료가 이들의 마음까지 치료해 주는 듯 했다.
옆 교실에서는 건강교육이 열렸다. 돼지, 소, 닭 등 가축과 함께 생활하는 이들에게 흔히 발생하는 기생충예방 등 위생교육 위주로 진행됐다. 주거문화개선 등 주민 생활환경을 바꾸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하지만 아직 이들에겐 요원한 이야기다.
정부와 NGO에서 위생교육을 하고 있다지만, 이들의 근본적인 생활문화가 개선되지 않는 이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건강교육에 참여한 주민들의 손에는 구충제가 하나씩 쥐어졌다. 준비해 간 비타민영양제는 아이들에게 큰 선물이자 기쁨이 되었다. 양은 얼마 되지 않아도 그 새콤하고 달콤한 맛은 아이들의 가슴에 추억이 되어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이었다.
우기의 라오스 산간지역 날씨는 변덕스러웠다. 햇살이 반짝이며 쾌한 산들바람이 불어오다가도, 갑자기 굵은 빗줄기를 쏟아내곤 했다. 그러나 몽족인들은 비가 온다며 부산스럽게 호들갑을 떨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그저 여유롭고 넉넉한 미소로 낯선 풍경을 대하는 이방인을 지켜볼 뿐이었다.
오전 11시가 넘어갈 즈음. 한 아이가 울면서 엄마 품에 안겨 진료실에 들어왔다. 이제 겨우 갓 두 살을 넘겼다는 아이는 오른쪽 허벅지가 온통 곪아 있었다. 진피와 피하 조직에 나타나는 급성 화농성 염증인 봉와직염이었다. 언뜻 육안으로 보더라도 금방 손을 써야 할 것 같았다.
강기훈 선생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상처가 너무 깊어 즉시 수술이 필요해 보였다. 그 상태로 두었다간 패혈증으로 발전해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만약 뼈까지 침투한다면 골수염이 될 수도 있다. 설명을 듣던 엄마는 조심스런 표정으로 보채는 아이의 입에 젖을 물려주었다.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곧바로 쿤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아이를 후송하기 위해서다. 쿤 병원에서는 주사제라도 응급처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만약 쿤 병원에서 치료가 안된다면 더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
숨 쉬지 않는 신생아 ... ‘아이를 살려라!’
같은 시각, 쿤 병원에 한 산모가 들어섰다. 출산이 임박했는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현지 의료진에 대한 기술이전과 협력사업 관계로 산부인과 조현정 선생이 자리를 비운 터였다. 병원 관계자도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김영선 간호사가 부리나케 응급실로 향했다. 20대의 산모는 초산이라 그런지 더 힘겨워하는 듯 했다.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산모는 보호자도 없이 진통을 거듭하며 몸부림 쳤다.
얼마나 지났을까. 산모가 아이를 분만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아이가 태어났다.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아이가 숨을 쉬지 않았다. 떠나갈 듯 울어야 할 울음도 터지지 않았다. 응급실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소아과 강하라 선생이 뛰어 들어갔다.
아이는 그때까지도 숨을 쉬지 않았다. 강 선생은 순간, 사산아인줄 알았다. 그와 김영선 간호사는 곧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산소공급이 급박한 상황이었다. 자칫 시간이 조금이라도 지체되다간 소중한 생명을 담보할 수 없었다.
산소호흡기로 산소를 정상적으로 공급해야 했지만, 병원에는 그런 장비가 전혀 갖추어있지 않았다. 마침 강하라 선생과 김영선 간호사의 시야에 종이컵이 들어왔다. 둘은 종이컵을 아이의 입에 대고 산소호흡기를 대신했다. 곧 거짓말처럼 아이가 숨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김 간호사는 그때부터 산모와 아이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아이가 자칫 몸부림을 치면 그나마 응급조치로 붙여놓은 종이컵이 떨어질 게 뻔했다. 산모와 아이를 후송하기 위해 폰사완시에 위치한 도립병원에서 출발한 앰뷸런스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쯤 후. 이들을 떠나보내는 봉사대원들의 마음이 걱정스런 눈빛만큼이나 무거워 보였다. 앰뷸런스가 토해내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묻혀 시간은 또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당장 수술이 필요합니다” ... “그건 가족이 선택할 문제입니다”
오후 2시. 봉와직염으로 치료가 필요했던 몽족마을의 아이를 태운 자동차가 쿤 병원 주차장에 들어섰다. 곧바로 소아과 강하라 선생에게 향했다.
“언제부터 이랬나요?”
“한 달 전쯤부터요. 갑자기 종양이 커졌어요. 이유는 저희도 모르겠어요”
“그동안 치료는 안 받았나요?”
“병원에서 두 번이나 주사를 맞긴 했는데, 별다른 효과가 없었어요. 오히려 증상이 더 심해졌어요”
아이의 엄마와 대화를 주고받던 강하라 선생이 고민에 빠졌다. 아이는 장기간의 입원치료가 필요해 보였다. 적어도 열흘 이상 항생제주사를 맞으며,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번 해외진료에서는 외과적 수술치료가 불가능한 상황이라 더 답답했다.
도립병원이나 큰 병원으로 가서 계속 주사를 맞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하자, 더 이상 병원진료는 어렵다며 엄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보건당국 공무원도 “이 문제는 가족이 판단하고 선택할 문제”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강 선생이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현재의 여건상 항생제주사를 놓아주는 것 밖에 달리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 분의 약을 처방해 주었지만, 이마저도 완치를 보장할 수 없었다. 결국 아이는 이번 봉사기간 동안 계속 진료소를 방문해 치료를 받기로 했다.
늦은 오후가 되자, 현지 의료진에 대한 기술이전 세미나 관계로 자리를 비웠던 조현정 선생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를 기다리는 또 한 명의 환자가 있었다. 바로 가족과 함께 진료소를 찾은 산모였다. 역시 초산이라는 이 산모는 그러나 생각보다 출산이 더뎠다.
이날 밤 조현정 선생과 이수정 약사, SMA 대원 구원 양 등 몇몇 스태프는 출산을 기다리며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라오스 의료봉사에서 ‘당직근무’를 설 줄은 몰랐다며 가벼운 농담을 건네는 조 선생의 입가에 싫지 않은 미소가 담겨 있었다.
하루 일과의 마무리는 언제나 말씀과 기도
이날 밤 대원들의 숙소. 하루일과를 마무리 짓는 순서는 언제나 소그룹활동이다. 찬양과 기도, 말씀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되짚고, 서로를 향한 마음을 모았다. 특히 의료계 대선배인 강기훈 선생은 ‘젊은’ 후배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관계, 사랑의 본질을 성경과 접목해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특강을 마련해 도움을 주었다.
강 선생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며 봉사와 건강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떠할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는지 잘 아신다. 결국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방법은 이타적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해 보내는 메시지는 무엇이고, 의료사역을 위해 어떠한 것들을 준비해야 하는지 묵상하는 대원들의 표정과 뜨거운 후배 사랑을 보여준 강기훈 선생의 열정이 겹치며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치열했던 봉사대의 하루는 그렇게 또 한 번의 밤을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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