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특집] 자랑스런 재림교인 정재용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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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 김범태 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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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02.29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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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파고다공원서 독립선언문 낭독한 애국지사
그는 일경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인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목숨을 걸고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여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독립투사다.
독립선언식 장소가 당초 예정됐던 파고다공원에서 인사동의 태화관이란 식당으로 갑자기 바뀌어 군중들이 혼란에 빠지자 정재용 선생은 품고 있던 독립선언서를 꺼내 낭독했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그의 목소리를 타고 3.1운동의 불길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퍼져갔다. 그러나 이 일로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한 후에는 의용단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다.
감리교 해주읍교회 전도사였던 정재용 선생은 1919년 2월 17일 서울에서 감리교 교단의 박희도 전도사로부터 인편으로 보내온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는 조선기독교중앙청년회(YMCA) 간사로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다.
이 편지의 내용은 일본의 동경 유학생 송계백이 한 달 전 내왕해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이 강화조약의 기본조건으로 14개 조항의 원칙을 발표했는데 이른바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해 서울에서는 우국지사들이 비밀리에 획기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니 시급히 상경하라는 것이었다.
정재용 선생은 이 사실은 해주읍교회 최성모 목사와 최두현 전도사 그리고 의정여학교 노선형 선생 등 동지들에게 알렸다.
이튿날 아침 현금 500원을 소지한 뒤 상경해 서울 서대문 박희도 간사의 집에 들렀다. 마침 독립운동자금 조달 책임자인 동화약방 주인 민강 씨를 나 500원을 입금시켰다. 독립운동의 핵심인물인 박희도 간사는 내실로 들어가 독립선언계획을 자세히 설명했다.
기독교 측에서 이승훈, 박희도, 천도교 측에서 최린, 불교 측에서 한용운, 최남선을 주축으로 독립운동의 원칙을 첫째 대중화, 둘째 일원화, 셋째 비폭력으로 정했다는 것이다.
2월 10일 이후 육당 최남선에 의해 독립선언서를 비롯해 일본 정부 및 조선총독부에 보내는 독립통지서,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가 작성됐다. 23일 박희도 간사는 김원벽(연희전문) 씨를 만나 각 학교 대표자들이 종교계 대표들과 연합해 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을 협의했다.
24일 마침 고종 황제의 인산(국장)이 3월 3일로 정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지방에서 상경할 것을 예측하고 거사일을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으로 정하고, 이날 독립선언서를 낭독해 독립을 선언하는 등 8개 항이 확정됐다.
거사 전날인 28일 아침 일찍 정재용 선생은 상경해 중앙감리교회로 김창준 목사를 찾아갔다. 그는 마침 잘 왔다면서 “원산감리교회 곽명리 전도사가 아침 기차로 원산에 가는데 그 편에 원산지방의 독립선언서를 보내야 한다”고 귀띔했다.
원산에는 민족대표로 서명한 오화영 목사와 정춘수 목사가 있었다. 정재용 선생은 해주의 의창학교 교사로 근무한 곽명리 전도사를 잘 아는 사이니 자신이 전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독립선언서 100여장을 받아 신문지에 싸 말아 쥐면서 무심히 한 장을 접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곧장 경성역으로 가 대합실에 들어섰다.
고종 황제의 인산으로 상경한 수많은 사람들로 역 안은 붐볐고 정사복 왜경의 삼엄한 경계가 펼쳐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서성거리며 개찰시간을 기다리는 곽 전도사를 발견했다. 그 앞으로 가서 눈짓을 하고 선언서 뭉치를 건넸다.
오후 2시경 정동감리교회에서 “오늘 오후 5시 가회동 손병희 선생 댁에서 민족대표들이 모여 명일의 거사에 대해 마지막으로 모임을 갖는다”는 말을 들었다. 여관으로 돌아와 누워 있자니 ‘종교 등 모든 것을 초월해 독립이라는 일념 아래 모여 협의를 잘 하겠지’ ‘대표자 간 혹 의견대립이 없을까’ ‘애국정신으로 뭉쳤는데 혹 사견을 내세울까’ 하는 갖가지 생각에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드디어 3월 1일 새벽. 정재용 선생은 박희도 간사를 찾아갔다. 간밤의 회의는 계획대로 잘 됐는데 한 가지 크게 변경된 것은 파고다공원으로 예정됐던 장소를 인사동의 태화관으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파고다공원에 모인 군중이 만세를 부르며 시가로 행진해 나갈 경우 인산 때문에 올라온 수많은 사람과 합세하게 되면 혼란과 유혈이 일어날 것이란 염려에서 였다.
정재용 선생은 민족의 생사를 가름하는 기로에서 목숨을 두려워해서 어쩌나 하는 생각에 다시없을 기회를 놓쳐버릴 것만 같아 안타깝기만 했다. 희생없이 하는 것도 좋지만 천재일우의 절호한 때 일개 요리점에서 2000만 민족을 대표한 이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다면, 민중의 제창도 없게 되며 우리나라가 독립을 선언했다는 것을 누가 알 수 있을 것인가! 심기가 착잡했다. 그는 호주머니에 깊숙이 넣어두었던 독립선언서를 꺼내 무심결에 다시 읽었다.
11시30분경 정재용 선생은 이규갑, 최두현, 노선형 등 동지들과 함께 파고다공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팔각정 정자 위에는 역시 아무런 좌석 준비도 없었고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인산을 참배하러 올라온 듯한 시골노인 10여명만 보일 뿐 이었다.
오후 1시30분경 공원 북문으로 학생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석탑을 중심으로 4000여명이 모여섰다. 학생이 주류를 이룬 인파 속에 시간과 장소는 정적으로 이어졌다.
2시경 회색 중절모에 흰 두루마기를 입은 정재용 선생은 팔각정에 오르며 ‘이 선언서를 내가 읽어야 할 찰나’라고 생각했다. 계획에도 없는 돌발적인 것이었다. 순간 손은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선언서을 꺼냈다. 펼쳐드니 ‘독립선언서’ 다섯 글자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용기를 내어 ‘조선’ 두 자를 더해 “조선 독립선언서”를 외쳤다. 그러자 군중들은 감격해 함성을 질렀고, 장내는 진동했으며, 만세소리는 하늘을 뚫었다. 군중들의 흥분은 격동되고 발을 구리는 소리는 땅이 꺼질 듯 했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약 10분 만에 38자 46행 8소절의 본문과 공약 3장을 일사천리로 낭독하고 “조선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군중들은 따라서 천지가 진동하도록 제창했다. 학생들은 모자를 벗어 하늘에 날렸고, 서로 부둥켜안으며 독립의 기쁨을 나누었다.
이것이 기미년 3월 1일 파고당공원에서 자주독립을 목적으로 일어난 민족적 의거의 시발이고, 역사의 현장이었다. 당시 감리교 해주읍교회 전도사였던 정재용 선생은 훗날 아들인 정사영 박사의 전도로 세천사의 기별을 받아들이고 재림교인이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도 모두 재림신자가 되었다.
내용 중 일부 <수양산인 정재용 전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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