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역사와 성경에서 배우는 삶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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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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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1.02.12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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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 1년, 그리스도인의 삶과 예배의 본질을 생각한다
■ 서론
필자는 지난해 5월, 이른바 ‘코로나19 시대’에 정립해야 할 재림교회의 예배와 설교에 대한 글을 기고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코로나19 사태가 이렇게 오래 우리 사회와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지 못했다. 해가 바뀌었지만, 코로나19 상황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온라인 예배와 대면 예배 사이에 방역 당국과 교회는 줄다리기를 계속하고 있고, 당국의 권고를 어기고 대면 예배를 강행했다가 터져 나온 집단감염으로 인해 개신교는 그 어떤 집단보다 강하게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돼 버렸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직 우리 재림교회는 전국의 수 많은 교회와 병원, 요양병원을 비롯한 기관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아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필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 역사와 성경의 교훈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지 다시 한 번 조명하려 한다. 백신이 나오고, 치료제가 개발됐지만 여전히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코로나19 상황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지, 그리고 예배의 본질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 한다.
■ 중세 흑사병 시대에 루터와 쯔빙글리
인류 역사에서 지금의 코로나19 상황보다 훨씬 심각했던 전염병은 14세기 유럽을 초토화했던 흑사병이었다. 중앙아시아 대평원의 쥐벼룩에서 발병한 흑사병은 1347년 10월 이탈리아 제노아 선박들이 시칠리아에 도착하면서 유럽 전역에 퍼지기 시작했다. 위키 백과사전에 의하면 유럽에서 7,500만-2억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중세인들은 흑사병을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간주했고, 파손된 혈관에서 피부 아래로 피가 흘러나와 생기는 출혈 반점을 ‘하나님의 징표’(God’s Mark)로 여겼다.
당시는 왜 흑사병이 발생하는지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중세 교회는 흑사병을 퇴치하기 위해 많은 미신과 주술을 만들어냈다.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는 고행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채찍질 고행단’(Falgellants)이 출현하기도 했다. 다른 인종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유발시키기도 했다. 특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을 퍼뜨려 집단학살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중세 교회는 사람들에게 연옥사상을 주입했다. 사람이 죽으면 지옥이나 연옥에 가서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천국문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교회가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 이후 연옥에 머무르는 시간을 단축하고, 하나님의 형벌을 면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게 되었는데,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양의 면죄부를 판매할 수 있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만큼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종교개혁자들도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1505년 루터(Luther)는 흑사병으로 동생 둘을 잃었다. 사람들은 흑사병을 하나님이 내린 형벌이라 여겼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도망하는 것은 불신앙이라고 주장했다. 이때 루터는 그의 책 <치명적 흑사병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것인가?>(Whether One May Flee from a Deadly Plague?)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만일 집에 불이 났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물에 빠졌을 때 수영하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익사해야 하는가? 다리가 부러졌을 때 의사의 도움을 받지 말고 ‘이건 하나님의 심판이야. 저절로 나을 때까지 참고 버텨야 해’라고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배고프고 목마를 때 왜 당신은 먹고 마시는가?”
덧붙여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께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를 지켜달라고 간구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소독하여 공기를 정화할 것이고, 약을 지어 먹을 것이다. 나는 내가 꼭 가야 할 장소나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아니라면 피하여, 나와 이웃 간의 감염을 예방할 것이다. 혹시라도 나의 무지와 태만으로 이웃이 죽임을 당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기 원하신다면, 나는 당연히 죽게 되겠지만 적어도 내가 내 자신의 죽음이나 이웃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웃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누구든 어떤 곳이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갈 것이다”
흑사병이 확산될 무렵, 스위스의 쯔빙글리(Zwingli)는 매우 바쁜 일정 가운데 친구들의 권유로 몇 주간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자들이 병으로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자 자신의 휴식을 멈추고, 신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는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고, 말씀으로 위로해주며, 낙심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치유해 주었다. 그러다가 자신마저 1519년 9월 말 흑사병에 전염돼 10월경 죽음의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다행히 기적적으로 11월 중순에 회복했다. 그는 투병 중 ‘역병가’(Plague Song)라는 노래를 지었다. 그의 역병가는 재난 속에서 고행이 아닌 신실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임재하는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생생한 간증이기도 했다.
중세 전염병이 난무하던 시대에 종교개혁자들의 생각과 삶은 오늘 우리가 이 전염병 시대에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를 생각하도록 만든다. 근래 한국 개신교회는 코로나19 사태의 중심에서 사회적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다음의 설문조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참 가슴 아픈 현실을 보여준다.
지난해 6월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실시한 대국민 인식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로 가장 타격을 많이 받은 종교는 개신교(82.1%)로 나타났다. 우리 국민은 불교와 천주교인에 대해 ‘온화한’ ‘절제적인’ 같은 긍정 이미지를 가진 반면, 개신교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싶은’(32%), ‘이중적인’(30%), ‘사기꾼 같은’(29%)로 부정적 이미지로 인식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개신교에 대한 국민적 이미지가 급격히 하락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사회가 원하는 교회의 모습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국민들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윤리와 도덕 실천’(34.8%), ‘약자 구제 및 봉사’(24.1%), ‘정부와 소통’(12.1%), ‘사회통합(8.0%)’ 등이다. 이 같은 결과는 위에 언급한 종교개혁자들의 삶과 일맥상통함을 볼 수 있다.
결국 교회의 역할은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다. 사회도 이를 원하고 어쩌면 이 모습이 교회의 이웃을 향한 본연의 모습일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여기에서의 강조점은 세상의 소금이라는 것이다. 우리집 식탁의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소금의 역할을 잃으면 그저 쓸모없는 물건이 되고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 못되어서 사람들에게 오히려 우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 성경에서 보는 참된 예배
코로나19 시대, 예배는 그리스도인에게 너무나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온라인 예배와 대면 예배 사이에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성경적 예배의 본질을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수가성 우물가에서의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살펴보자.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던진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요 4:20).
그러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 4:21-24).
예수님 당시까지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다.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렸고, 사마리아인은 “이 산”이라 지칭한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려왔다. 그러면서 각자 자신들의 예배가 참되다고 주장했다. 이런 맥락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어느 곳에서 드리는 예배가 진짜 예배인지를 예수님께 물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올 것”(21절)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대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예배 장소에 대한 구약의 배경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솔로몬 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법궤를 모시고 광야 이곳 저곳을 이동했던 이스라엘은 이제 거대한 왕국이 되면서 법궤를 예루살렘 성전에 안치하고 성전 중심의 종교를 강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누구든지 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을 정립해야 했고, 최소한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직접 와서 동물을 희생제로 드려야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었다.
그러다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됐다.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남유다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북이스라엘은 더이상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자 사마리아에 수도를 정하고, 그리심산에다 성전을 지어 예루살렘 성전을 대체했다. 이것이 그리심산 예배의 기원이다. 그리심산은 요단서편 세겜의 남서쪽 지중해에 있는 해발 약 950m의 산이다. 예루살렘 정북 쪽으로 50Km쯤 떨어져 있다.
북이스라엘은 BC722년 앗수르제국에 멸망 당했고, 앗수르의 혼열정책에 의해 이방인들과 섞이기 시작했다. 남유다는 BC586년 바벨론에 멸망 당해 포로로 끌려갔다. 신앙의 중심지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됐고, 더 이상 성전 중심의 예배를 할 수 없게 됐다. 포로의 땅에서 절망하던 유대인들은 이제 성전을 대신할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들은 마을회관과 같은 곳에 모이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율법을 공부하면서 자녀들의 신앙을 교육했다. 이것이 회당의 시초이다. 여기서 등장한 율법전문가들을 ‘랍비’라고 부른다.
70년의 포로생활이 끝나고 유대인들은 고국에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잠시 복구했지만, 희랍과 로마의 침략을 당했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은 AD70년 로마에 의해 멸망 당하고, 예루살렘 성전 역시 서쪽 벽만 남긴 채 완전히 파괴당하고 말았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굳이 언급하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유대교 신앙은 기독교의 성전 개념을 형성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 제자들에 의해 시작된 초대 교회에서도 여전히 유대교식으로 예배당을 성전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 이제 요한복음 4장의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로 돌아가 보자. ‘예루살렘인지’ ‘그리심산인지’ ‘어느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예수님은 그 어느 곳도 아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할 때가 이르러올 것임을 가르치셨다.
갈보리 언덕에 한 온전한 제물이 서셨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수천년 동안 수많은 희생제물이 죽어가며 가르쳤던 제물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온전한 희생제물로 못 박히셨다. 그러나 같은 시각, 유대인들은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 예루살렘 성전에서 양으로 유월절 희생제사를 드리고 있었다. 같은 시간에 두 예배가 드려진 것이다. 하나는 해골의 언덕 골고다에서 예수님이 희생제물로 드려진 예배,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 없는 예루살렘 성전 예배!
우리는 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그리심산에서도 말고’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렇다! 아무리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장소에서 예배를 드린다 하더라도 예수님 없는 예배는 받지 않으신 가인의 예배가 될 수밖에 없다.
■ 교회사에서 보는 예배
사실 초대교회의 예배는 정형화된 방식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곳이 성전이든, 이방 땅이든, 심지어 감옥이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중세기를 겪으면서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나면서 오늘날과 같은 보다 체계적이고 형식적인 예배가 정착했다. 그리고 온 유럽이 서로 앞다투어 엄청난 규모의 부를 자랑하는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셨던 교회의 모습일까? 에베소서 5:19-20에 보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면 찬송하십시오. 모든 일에,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라는 말씀이 나온다.
예배의 주요 요소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처음에는 유대교 회당 한 모퉁이에서 예배를 드리다 유대교의 박해를 받아 쫓겨났고, 이후 곳곳에 흩어진 성도들의 집에 모이기 시작했다. 특히 로마의 극심한 박해 시기에는 그마저 힘들어서 비밀리에 모였고, 지하 동굴에서도 모였다. 이렇게 신자들이 모인 모임 그 자체가 ‘에클레시아’(세상으로부터 불러내다), 즉 교회이다. 그래서 그 어느 곳에서든 두세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면 그분이 함께 하신다(마18:20)고 약속하시지 않으셨는가?
그렇다면 이 두세 사람도 모이지 못하면 예배는 불가능한 것인가? 바울 서신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모두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고전 6:19, 3:16)이라고 선포한다. 이미 성도들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인데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각자 처한 상황에서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를 드리면 그것 역시 훌륭한 예배라는 것이다.
로마서 12장 1절에는,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실천적 삶이야말로 진정한 예배라는 것이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예배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말한 중세기의 루터나 쯔빙글리 같은 개혁자들의 삶은 좋은 모본이라 하겠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시대, 많은 교회가 예배당에서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전통을 어쩔 수 없이 중단해야 하는 목회자와 성도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필자도 목사로서 온라인 예배가 달갑지 않다. 하지만 전염병이라는 국가 위기 아니 세계 위기 상황에서 대면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이 중단되거나 교회의 본질이 손상되지 않는다. 온라인이라는 과학 기술을 도구로 하는 예배든, 가정 단위로 드리는 가정 예배든, 또 혼자 드리는 예배든, 시간과 장소 및 방법에 제한 없이 우리는 하나님께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우리 재림교회는 역사의 종말에 교회라고 하는 단체적 신앙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홀로 신앙생활을 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요한계시록 13장의 핍박이 올 때 우리는 하나님과 개인적인 야곱의 환란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진정으로 예배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삶 그 자체가 예배가 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우리가 다시 생각하고 추구해야 할 예배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세상에 드러내어야 할 마지막 긍휼의 기별!
그러나 온라인 예배가 장기화가 됨에 따라 사실상 많은 염려가 드는 것은 사실이다. 예배의 태도나 자세가 너무 안이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비대면 예배를 드리다가 대면 예배로 바뀌는 상황이 와도 저녁예배는 코로나19 사태 이전의 상황과는 너무나 다르다. 불가피하게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동시에 온라인 예배도 병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 그저 집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것이 편해진 탓일까? 목회자인 필자도 혹 비대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오히려 편해지지는 않았나 하고 성찰해 본다.
지난 2007년. 한국 기독교는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진행한 바 있다. 약 10만 명이 참석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평생을 제자훈련에 헌신한 전 사랑의교회 담임목사인 옥한흠 목사가 설교를 맡았다. 그는 운집한 인파를 향해 ‘회개’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했다. 그는 먼저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했다. 단순히 목청만 높인 게 아니라, 거의 절규에 가깝게 회중을 향해 회개를 거듭 강조했다.
이후 그날 설교주제를 회개로 정한 이유를 묻는 한 기자의 질문에 그는 “한국 교회의 유례없는 성장 동력으로 축복, 형통은 단골 메뉴가 되었지만, 회개나 제자의 삶은 부담스러운 부분이 되고 말았다. ‘목회 말미에 정녕 무엇을 해야 할까’ 하나님 앞에 반추하며 고민해보니 너무도 부끄러운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장기화되고, 말할 수 없이 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럴 때 교회가 잃어버렸던 생명력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그 생명력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세우신 그 자리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통렬한 자아 성찰과 회개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에게는 이런 기도가 필요하다.
-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진정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 참된 회개의 마음이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지기를.
- 교회가 형식과 규모 그리고 행사중심의 모습을 그치고 진정한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는 곳으로 변화되기를.
- 교회의 변화로 진리의 빛이 새롭게 드러나기를.
- 세천사의 기별이 온 세상에 환하게 전파되어 예수님의 재림을 곧 맞이하기를
■ 결론
이제 우리는 재림교회를 세상 역사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기별을 전할 교회로 세우셨음을 기억하자! 그 기별은 세 천사의 기별이다. 그런데 세 천사의 기별이 그 어떤 교리보다 더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어쩌면 바로 우리 재림교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드러내고, 전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세 천사의 기별이 가진 핵심일 것이다.
“신랑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은 백성들에게 ‘너희 하나님을 보라’고 외쳐야 한다. 세상에 비칠 마지막 자비의 빛 곧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마지막 긍휼의 기별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그들은 저희의 생애와 품성을 통하여 저희를 위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야 한다” <실물교훈> 416.
#특별기획시리즈 #Stop에서Step으로 #코로나임팩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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